#1 비오는 날, 극장에 갔어
지난 10주동안 매주 화요일이면 혜화동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강의실에서 시인 황지우 선생님이 진행하는 <명작읽기> 수업을 다녔다. 내가 수강한 것은 명작읽기 2. 중세의 광기와 카니발 정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넘어 바로크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건넜다.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넘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고 있다. 무엇보다 시대의 바탕화면이 될 만한 배경지식을 익히는 재미가 솔솔하다.
토요일 한국과 그리스의 월드컵 16강전이 있던 날, 하늘은 무겁게 수분을 머금은 진회색 구름으로 가득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연극 <리어왕>을 보기 위해 명동예술극장으로 향하는 길. 빗물을 머금은 도시의 잔영, 그 여백을 메우는 것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수십명의 여성 댄서들이다. 모 기업의 후원을 받아 명동 한 가운데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춤을 춘다. 스포츠를 통한 집단 광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엇다. 현대의 스포츠는 익명의 인간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장치다.
최근 셰익스피어가 무대에 자주 오른다. 레이디 맥베스를 시작으로 4대 비극 중 가장 처절한 <리어왕>이 극단 미추의 무대로 올랐다. 3년 전 토월극장에서 보았던 동일 극단의 <리어왕>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무엇보다 연출가의 상상력이 더욱 견고해졌다. 예전 리어왕은 무겁게 메시지를 전달하느라, 권력의 광기 아래 버려진 참담한 인간의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가볍다. 존재론적 가벼움이란 뜻일 거다. 장난도 치고 웃음도 잘 머금는다. 그러나 그를 보는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고전의 힘이란 바로 인간의 본질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동일하다는 점을 가르쳐준다는 게 아닐까. 시간의 시금석을 넘어,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습을 대면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클래식의 힘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할 것 같다. 왜 고전이 자꾸 반복되는 걸까? 특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시간차를 두고 순환하는 이유는 뭘까? 오늘 글은 바로 이 답을 얻기 위한 것이다.
# 늙으면 다 죽어야지......라는 푸념 앞에서
노쇠한 왕 리어는 세 딸에게 전 재산을 분배하고 여생을 쉬려한다. 왕국을 삼분하여 나눠주기 전, 딸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맏딸과 둘째딸은 갖은 미사여구로 자신의 사랑을 과장하지만 가장 사랑받던 세째딸은 거짓 고백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격분한 리어는 그녀를 내쫒는다. 충신 켄트가 리어의 경솔함을 지적하지만 그 또한 추방당한다. 두 딸은 왕국을 얻자마자 변심, 아버지 리어를 폭풍우 치는 날 내쫓고 만다. 한편 글로스터 백작은 자신의 서자 에드먼드에게 속아 적자인 아들 에드거를 내쫓고 애드먼드의 모함으로 눈이 뽑히고 고문당한 채 버려진다. 폭풍우 치던 밤, 모든 걸 빼앗긴 리어왕의 절규는 잊을 수 없다.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을 찢어라. 세상은 오직 광기어린 바보들로 가득한 무대가 아니던가."
리어왕은 셰익스피어가 쓴 4대 비극 중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작품이다. 삶에 대한 진득한 통찰과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의 본성을 이보다 잘 표현한 대사가 있을까? 권력에 미친 자들과 그 광기의 사슬에서 풀려나와 모든 것을 상실한 인간이, 허무한 권력의 힘을 깨닫고 소중함을 배우게 되는 반복되는 교훈은, 왜 지금까지도 정치 권력을 둘러싼 희극같은 정경과 맞닿아 있을까. 인간은 왜 이런 숙명에서 '주체'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디 이뿐이겠는가? 노령화 사회를 향해 가는 지금, 전통적 개념의 효 개념은 완전히 폐기될 위험에 있다. 세익스피어는 참 야비할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본다.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고 싶나? 그러면 돈 주머니를 죽는날까지 차고 있게나"라고
# 3 그래도 살아야 한다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
에드거의 대사다. 그가 말하는 바보는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세상에서 여전히 버겁고 비루한 생을 끌어가는 이들의 표상이다. 주체가 되기보다 떠밀려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과 다를바 없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는 글로스터 그의 대사가 귓전을 때린다.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여, 이것을 약으로 삼아라.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네 자신이 이 비바람을 맞아봐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들의 죽음이 사회적 현상이 된 요즘, 죽음이 기억되지 않는 사회적 배제의 망에 포박된 인간의 삶이 기억났다. 용산참사가 그랬고, 촛불을 들고 저항했던 미약한 우리들의 초상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 글로스터를 설득, 그래도 생은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에드거.
"이게 밑바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결코 밑바닥이 아닌 것이다."
에드거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그의 자살을 막는다. 그러나 삶은 너무나 처연하게 타인의 칼에 글로스터가 죽도록 놔둠으로써, 만신창이가 된 삶의 혹독함과 마주서서 보도록 유도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성은 이런 대면의 순간에 쏟아져나오는 진실의 버거움에서 나온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볼 때마다 숙연해지는 이유다. 이 권력의 가면은 세대를 관통해서도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음을 배운다. 세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사람들을 섬기겠노라 호언했던 자를 군림하게 한다. 평생 권력이 자신에게 입혀진 한 벌의 옷과 같은 것일 거라 믿게 한다. 왕과 백작으로 살아오던 리어와 글로스터는 그 옷을 벗고나서야 남의 말에 조정당해 온 자신의 면모를 수월하게 보게 된다.
# 4 광기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내는 법
리어는 말한다 "죄악에 황금의 갑옷을 입히면, 날카로운 정의의 창도 상처를 내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다"라고. 정치 지도자의 도덕적 결함을 발견하고도, 그저 배부르게 살 수 있다는 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고 그에게 황금 갑옷을 입힌다. 이 경우 아무리 투표를 하고 저항을 해도 그 정의로운 절차의 힘이 갑옷 속에 숨은 죄악을 드러내지 못한다. "가난이란 것은 참 신기한 마술 같다. 보잘 것 없는 게 커 보인다"라고 리어는 말한다. 물질적 풍요 속에 영혼의 가난을 추구하지 못한 우리들은 이 대사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오만한 자는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광야의 들판에 던져지고서야 뉘우친다. 어디 이 세상이 연극 속 세상과 다르겠는가. 연극의 힘은 무대 속의 세상에 우리를 비추어보는 것에 있다. 그것이 현존의 힘이고 무대를 통한 인간 감성의 교육이다.
월드컵의 향연 속에 집단의 자발적 뜨거움이 광기로 변질되기 쉬운 지금이다. 집단에 대한 긍정적 마취라 불리는 스포츠는 우리 사회의 모든 길항작용과 갈등을 봉합하는 실이 되어 버렸다. 이 불편한 유니폼을 입은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닫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집단 마취 속에서도 '진실'이 힘을 잃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스포츠를 통한 우리의 긍정적인 열기가 내면이 온통 권력의 광기로 사로잡힌 이들의 조정에 사로잡히지 않길 바란다.
사진제공 : 명동예술극장
글& 취재 : 김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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