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가족의 힘은 세다-연극<양덕원 이야기>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0. 6. 5. 17:18

 

 

S#1 가파른 호흡의 세계, 따스한 쉼표를 찍다

 

극단 차이무의 <양덕원 이야기>를 봤다. 개인적으로 차이무의 작품을 즐겨보는 편이다. 연출가 이상우의 방식에 매혹된 이후, 차이무의 모든 작품을 보려 노력중이다. 다시 돌아온 '연극의 봄'을 유지시켜줄 미학의 힘을 가진 극단, 차이무는 차원이동무대선이란 뜻이다. 극을 보는 차원을 이동시키려 무대 위에 진수시킨 배란 뜻이다. 관객은 배우들과 연출가가 준비한 배에 승선, 극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신랄한 정치풍자를 비롯, 시대의 아픔과 웃음을 담으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던 차이무의 작품들, 그 레퍼토리 면면이 귀하다.

 

시대가 짊어질 할 생의 무게가 육중할수록 연극은 두 개의 세계를 오간다. 옛길의 무늬를 찾아 돌아가는 회상의 세계와 초현실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것. 이 두개의 흐름은 서로 충돌하거나 병립하며 극의 전개를 이끈다. 되돌아보면 지난 2년 3개월,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정치적 풍경은 우리 사회 내 탈진한 영혼들을 도처에 잉태시켰다. 연극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의 쉼표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들숨과 날숨의 세계를 조율하는가에 따라, 호흡의 지속성은 확보된다

 

 

S#2 해체의 시대, 조화의 길을 묻는 '가족' 이야기

 

화(和)란 무엇인가? 균형과 절제, 따스함의 세계다. 한자 의미 그대로 함께 밥(米)을 먹는 입들의 풍경이요, 가을의 순정품 햇살과 비 속에 서로 몸을 비비며 자라나는 벼의 소리다. 땅을 점유하고 사는 인간이 발화하는 소리가 벼의 조화를 배울 때, 세상은 평화 그 자체이리라. 인간이 이 조화의 세계를 경험하는 첫번째 무대는 가족이다. 가족 해체의 시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혈연주의와 가부장의 잔여물인양 매도되는 이 가족만큼 이중의 얼굴을 가진 사회적 요소도 없다. 연극 <양덕원 이야기>는 바로 아버지의 부음을 앞두고 재결합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시간 후면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연락을 받은 가족들, 이들은 오랜 시간 잊혀진 고향 양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아버지는 하루가 지나도, 3일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는다. 삶의 터전인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가족들, 당장 딸린 가족들과 회사일로 아버지의 부음을 기다리는 과정 하나조차도 쉽지 않다.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 3개월의 시간. 유년의 시간을 채워준 '양덕원'도 변해간다. 함께 자랐던 '찌질이' 같던 친구들은 외곽 순환도로 개통과 더불어 지역 유지가 되었다.동네 신동이라 불리던 관우와 관모 두 형제는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 자리를 잡았다지만 서울의 삶은 퍽퍽함 그 자체다. 오랜동안 외딴 섬이 되어 살아왔던 형제들은, 아버지의 부음을 기회로 조우한다. 그 만남은 추억의 세계를 빚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연극 전편을 훓고 내려가는 단순한 일상은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가족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각인시킨다.

 

 

익명성을 외투처럼 입고 사는 우리들, 나를 둘러싼 외부의 이야기들, 동료나 친구, 지인들의 삶은 왠지 다 잘 풀리고 행복할 것만 같은 강박감. 비교와 비교를 거듭하며 지금 내 삶을 한탄해온 우리들은 왜 이다지도 비루한 것인지. 연극 <양덕원 이야기>는 바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상처의 무늬보다,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얻은 것들의 가치를 다시 한번 묻는다. 연극을 보는 순간 순간이 내 이야기 같은 상황. 그게 바로 공감이다. 가을녘 서로 몸을 비비는 벼들의 애무에선 따스한 정감이 흐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재산 등기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건 연극 속 세계만의 문제는 아닐 터.

 

 

S#3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죽음에 빚지고 산다

 

도시에서만 자란 터라, 방학이 되면 시골 외가에 간다는 친구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들이 말하는 동구밖의 세계가, 할머니까 쪄주었다는 튼실하게 알이 박힌 옥수수며 고구마의 단물이 궁금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예전 로마인들은 군사정복에 의해 만들어진 길을 '옛길 Via Antiqua'라고 불렀다. 이미 정복된 땅을 되돌아 보지 않는다는 교만이 녹아있는 말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옛길이야 말로 우리 내 산하가 고요하게 박혀있는 길이며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던가. 그 길은 고정된 세계지만, 되돌아가며 우리가 놓친 가치들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완의 길이기도 하다.

 

실개천이 지줄대는 금빛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질러, 강물이 흐를 것이다. 연극 속 <양덕원>은 바로 그 강물 위로 융기된 세계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죽음에 빚지고 산다. 극 속 가족들이 아버지의 부음 앞에서 비로소 하나로 뭉치고 해묵은 감정을 정리한다. 죽음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잊혀진 추억에 대한 회상은, 우리가 다시 한번 복원해야 할 생의 가치를 수면 위로 떠올린다. 정치 지도자건, 부모님의 죽음이건, 그들의 삶이 말하는 '화(和)의 가치'는 지상에서 비루하게 싸우는 우리 모두를 얼르고 먹이며 키운다. 그 죽음을 기억하는 자, 조화의 도정 위에 서게 되리라. 

 

지방선거도 끝났다. 여소야대의 권력이동 앞에서, 보수언론의 입막음 현상은 어느 때보다 극렬하다. 지금껏 보여주지 않던 소통과 대화란 단어를 남발한다. ' 이제부터 듣겠다'라는 서울시장의 담화문은 '이제까진 개무시했지만'이란 전제를 스스로 자백한 셈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건 갈등의 무게를 줄이고, 조화의 의미를 배우는 일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작은 차이를 배우는데도, 어느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한 사회. 누군가가 처절하게 죽어야만, 그때서야 마음 속 영혼의 부채를 씻어내려는 집단 행동에 들어가는 우리들의 정서. 이것 또한 심판대에 올라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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