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회사일을 보고, 병원가서 정기검진을 받고
오후엔 인사동으로 나갔습니다. 인사동을 거쳐 삼청동으로 가는
제 갤러리 동선에는 항상 몇개의 화랑이 상수로서 존재합니다. 좋은 작가들을
잘 발굴하는 노암 갤러리에서, 인사아트센터, 아트 사이드와 같은 몇 개의
실력있는 갤러리는 꼭 들르는 편이죠. 오늘 인사아트센터에
잠시 들러 전시를 볼 요량으로 1층 부터 천천히 작업을
인사아트 센터는 약간 장르별로 층이 정해져 있어
3층은 항상 도예전시가 있고 4층부터는
일반 개인전도 많이 열립니다.
처음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이기에, 그냥 석사 청구전이나
개인전인줄 알고 가려고 했다가 철문 아래 놓여진 캔버스화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렇게 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미술 평론가 이주헌 선생님이 발문을
쓰셨길래, 저는 굉장히 화력이 오래된 분이겠구나 했었지요.
입춘대길이라 쓰여진 무늬목 대문 아래
멀끔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 개의 눈빛이 참 친숙합니다.
작가는 철저하게 창과 문을 소재로 3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더군요.
짭조름한 생의 햇살이 겨우내 언 사무실 내부에 스며들고
제 서재의 한켠을 따스하게 메울때, 빛이 있어
삶은 더욱 환하게 소통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때 빛은
내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고 관계맺고 있음을 확증하는 일종의 기표이자
과거의 그리움과 현재의 나를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창과 문을 그리되, 빛의 방향성이 오롯하게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축축해진 자아의 갑옷을 벗어 말리고 싶은 그런 날씨.
인사동을 거닌 오늘도 그런 날씨였고, 그림 속 꽉 메운 초록빛 창가와
문틈 사이로 헤집고 들어오는 빛의 양도 적당하고 좋습니다.
문과 창은 생의 이면으로 확장되는 통로입니다.
그 경로를 통해서 우리는 주변부와 중심, 나를 둘러싼 풍경과 만나지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영혼의 창을
환하게 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빨래도 널고
시원한 미풍의 입자가 너른 옷의 결들을
위무하며 흐르며 우리를 껴안습니다.
샛노란 슬레이트 문틈 사이로 보이던
우리들의 남우새스런 우리들의 생이 보이던 그때
아주 어린시절, 많은 친구들이 그림 속 철문이 있는 가건물에서
살았더랬습니다. 저는 부산의 가난한 하꼬방집들이 있는 동네에서 살았지요.
한지를 투과하는 햇살이, 바닥에 비추일땐, 백색 물감을 옅게 푼 빛이
회백색 다듬이돌 위에 올려놓은 피륙위로 흘러내릴 때, 느껴졌던
그 고요한 아름다움과 정적의 시간을 기억해 봅니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서양화를 전공한 분도 아니고
마케팅 관련 회사를 운영하시는 대표란 점도 놀랍습니다. 오랜동안 트레이닝을
하신 것도 아니고 3년동안 훈련하셨고 지금도 물론 진행형이지만
구력이 상당한 작가의 면모가 느껴져서 놀라왔습니다.
미술을 많이 좋아하시는지, 자녀분들도 서양화를 하시고
따님이 잠시 외국에 가 있는 동안, 비어있는 작업실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셨다네요. 어린시절 되고 싶었던 화가의
꿈을 환갑이 되는 오늘, 이렇게 전시를
엶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오랜세월 기업을 이끌고 자녀를 키우면서
작가에겐 열어 젖혀야 할 마음의 문, 운명의 문이 수없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한번쯤 도전하고 열었어야 할
문에도 녹청빛 이끼가 끼기도 하고 자물쇠가 채워져 이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작가는 창과 문에 예쁜 프리지아 꽃과 햇살, 적당한 바람의 무늬를
넣어 회환 속 문의 풍경을 완성합니다. 환갑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마음이
느껴졌던 오후였습니다.
의미있는 회갑연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래 수요일은 인사동에선 수도 없이 많은 전시회 오프닝이
열립니다. 이 전시도 오늘이 오프닝이어서, 음식들을 내놓는데, 어린시절
먹던 건빵을 튀겨 설탕을 묻혀 내놨습니다. 작가 선생님께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시더군요.
거리를 향해 얼굴을 내밀듯
우리의 마음도, 닫힌 마음도 봄 햇살과 더불어
조금씩 더 열고 맞이하고 흠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놀라운 건 작가 선생님이 제 이름을 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물어보니 제 블로그의 꽤 오랜 독자분이시더군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건 정말
세렌디피티다. 우연한 만남이다란 생각이었죠. 전시회를
하는지도 몰랐고, 알려주시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날 오전에 건강
검진받고 반차 쉴수 있는 날이 아니었으면 사실 인사동에 가지도 않았을거고
원래 4층은 잘 가지도 않는 편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가고 싶더라구요.
이렇게 생각지 않은 곳에서 온라인 상에서 댓글로만
뵙던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니 정말 놀라왔습니다.
더욱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림이 저를 불렀다는 사실이겠죠.
행복한 우연, 세렌디피티 앞에서 무척이나
기분좋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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