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록웰 <언론의 자유> 4개의 자유 중 첫번째 그림, 1943년
한나라당이 대국민 선전포고를 했다. 미디어법을 직권상정.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악법을 관철시켜, 국민 모두를 영혼의 장례식으로 끌고간다. ㈜한나라 상조가 관철하는 미디어 악법은 마치 예전 '툭치니 억 하더라'는 독재정권의 '미디억' 악법이다. 67퍼센트의 반대여론을 무시하며 민생안정이란 연결될 수 없는 논리를 들먹인다. 언론의 관영방송化 를 넘어 재벌과 친일 족벌보수언론에 방송의 사명을 넘기려는 후안무치의 횡보다. ㈜한나라 상조의 국민여론 전체를 무시하는 떼법의 논리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의 삽화가 노먼 록웰의 <4가지 자유>란 작품을 골랐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앞둔 1943년 미국.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라디오 방송을 즐겨했다. 정치적 대의와 인류애에 호소했던 그의 라디오 방송은 삽화라 노먼 록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그는 영혼을 위해 지켜야 하는 4가지 자유를 테마로 그림을 그린다.
노먼 록웰 '언론의 자유' 두번째 그림
그림 속 배경은 버몬트의 작은 읍에서 열리고 있는 시민모임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역사에서 이 타운미팅(Town Meeting)은 민주주의의 기반암 역할을 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림 속 작은 마을에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 아저씨도 분명 할말이 가득 했을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국민의 절대반대하는 미디어악법을 관철하려는 ㈜한나라 상조의 행위는 기반암이 되어야 할 국민 전체에 대해서는 입말이 되어 버렸고 재벌과 보수언론을 위한 대변이 될 뿐이다.
록웰의 그림 속 타운 미팅에선 계층과 직업, 옷차림, 그 어떤것에 구애되지 않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미국의 헌법적 가치, '언론의 자유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명확하게 그려진다. 라디오 방송을 좋아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나 동일하다. 차이점은 라디오 방송을 사용한 목적이다. 루즈벨트는 국민들에게 권력의 방을 열어 초대하고자 했고, 모든 정치적 사안의 귀결과 과정을 묻고자 했다. 이명박 정권처럼 철저하게 라디오를 통한 '통보'만 있는 일방향의 의사소통은 하지 않았다.
노먼 록웰 <종교의 자유>
이명박 정권이 입각하며 사회의 각 부문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좌파정권의 10년이 만든 부산물과 싸운다고" 글쎄 이제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환율의 고공상승 보도는 점점 줄고 있다. 시장(Market)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보를 막는 것인데, 문제는 이 시대는 통제가 아닌 열림의 시대임을 잊은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증시는 1000대가 기준이 되었다. 1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강만수 장관의 초기 대응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고환율로 민생이 파탄난 지금에도, 그들은 잃어버린 10년 타령에만 빠져있다. 보수족벌언론들은 나팔수가 될 뿐, 비판적 성찰은 전무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이번 미디어 악법의 통과는 거짓말 협동조합(조중동)을 위한 선물일 뿐이다. 점글어가는 종이매체의 역사를 방송장악으로 메우려는 작태다.
친정부적 데모에는 넓은 관용을 베푸는 자들. 가스통에 불을 붙이고 휘발류를 뿌릴 때는 '시민의 안전'이 눈에 보이지 않다가 정부의 일방적 횡보에 반대하는 의견에는 '불법'과 '법치'를 운운하는 자들. 그러나 통계자료로, 가장 법을 안지키는 집단이 정치인 집단임이 밝혀졌다. 결론이 뻘쭘해지니 내용을 수정하라고 법무부 장관이 압력을 넣는 나라. 문제는 그런 사실을 여전히 모르는 이 땅의 시민들이 많다는 점. 언론이 장악되면 이런 일이 생긴다. 두번째로 박탈당한 자유가 바로 예배의 자유다. 같은 기독적 정신을 가져도, 한기총의 견해는 포용되나, 분배와 나눔을 이야기하는 기독입장이 짓밟히는 나라. 화있을 찌어다.
노먼 록웰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말끝마다 민생안정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무한책임이란다. 그런데 무한책임 한나라당이란 캐치 플레이즈를 읽을 때마다 '무책임한'으로 읽혀지는 이유는 뭘까? 신빈곤층이 부상하는 요즘. 아예 신빈곤층이란 단어를 쓰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청와대에선, 과연 국민들이 결핍으로 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은 하는것일까? 경쟁력 강화란 미명하에, 소규모 야학에 대한 지원도 다 끊고, 가난한 사람들의 최소 교육 기회마저 박탈하면서 그저 강남에 사는 자들은 이렇게 경쟁에 참여할 자들이 줄어들면, 내 자식이 유리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이 따위 이기주의가 우파의 생각일수 없다. 영혼이 없는 교육, 도덕성을 상실한 교육을 외치는 것은 우파가 아니다. 사교육을 막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7퍼센트가 더 늘어난 현실. 비껴갈 수 없는 결핍과 싸워야 하는 세대를 만든 ㈜한나라 상조, 화 있을진저.
노먼 록웰 <공포로부터의 자유>
국민은 두렵다. 일방통행 국회의원들의 죄악이 만드는 공포가 두렵다. 전여옥의 헐리우드 액션이 조소를 넘어 두렵기 까지 한것은 그녀가 멱살을 잡혔는데 안대를 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용산 참사로 6명이 죽어도 단순 유감인 나라. 그 나라가 두렵다. 3월 1일 삼일절, 일본침탈을 문제삼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하는 이 정권. 친일부역자를 민족 공로자로 포장하고,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안창호 선생님을 안창호씨라 부르는 MB가 두렵다. 그런데 그거 아나? 다 뺐겼다고 생각하면 들고 일어서는 것 밖엔 없다는 걸 말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부르주아 사회가 지탱되는 것은 그들이 미리 백신을 놓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들 스스로 정제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가진것을 티내지 않음으로서 원성을 사지 않고, 도덕적 리더쉽을 지키는 것. 그것이 쁘띠 부르주아의 사회를 지탱해가는 정신적 힘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회엔 그가 말한 부르주아가 없다. 오랜동안 통치를 하고 싶은가? 오랜동안 해먹고 싶다면 '당신들의 통치가 자연스런 역사'가 되도록 하라. 그것이 당신들의 통치를 인정하게 하는 기제가 될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이 땅의 쁘띠 부르주아들에겐 그런 감성이 없다. 그러니 뒤집어질 날만 기다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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