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대전에 내려갔습니다. 시립미술관 큐레이터이자 작가인
이순구 선생님과 섬유미술 작가 이미령 선생님, 독자 총아님, 네이버에서
애플뮤지엄이란 팬시관련 글을 올리는 파워 블로거 애플님과 충남대 경영학과에
재직 중인 박경혜 교수님, 저번 제게 이응로 미술관을 소개해주셨던
화가 이혜숙 선생님, 이렇게 8명이 모여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모두다 블로그 공간을 통해서 만난 분들입니다.
방송 후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길
서명숙이 쓴 <놀멍 쉬멍 걸으멍-제주 걷기여행>을 읽었습니다.
최근 제주 올레길이 개장하면서 걷기와 관련된 책이 인기를 끌고 있지요.
세계의 나라를 다녔고, 도시와 시골의 예쁜 골목길을 무수히 다닐때도,
두발로 걸어, 길과 길 사이에 예쁜 깨끔발 그림자를 낙인처럼 찍는 걸 좋아했던
저로서는 제주 올레길에 대한 그녀의 글에 흠뻑 빠졌습니다.
도시의 한가운데를 걸으면서도 숨어 있는
사각지대를 찾는 재미는 반드시 '느리게 걷기'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무심한 도시의 차가움 속에도, 회벽과 회벽 사이에
피어나는 장미꽃, 건물 위에 만들어놓은 특이한 설치 작품을 찾아보는 즐거움.
느린 대신 자세하고, 미시적인 삶의 관계를 한올 한올 더듬어가는
발걸음은 행복을 찾는 촉수가 되어 우리를 이끕니다.
원래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분할 때, 직립보행이란 표현을
사용해왔지만, 탈것이 등장하면서 걷기란 인간의 기능이 퇴화될 지경에까지
이르른 요즘, 다시 걷기를 시작하며 삶을 억누르는 속도에 저항하고
느림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트렌드가 등장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엑스포 공원 옆을 흐르는 둔산의 갑천을 보면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이 땅의 도시 조경을 생산한
이들의 기본적인 철학, '신속개발'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름답게 개발할 수 있는 자연도, 기계적인 구획으로 만들어 버린 느낌이 강하지요.
엑스포 공원은 한산했습니다.
지금 시설 개보수를 위해 운영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걸으며 사진을 찍기에는 오히려 더 좋더라구요.
붉게 물든 나뭇잎이 소리 소문없이 흘러가버린
이 만추의 시간 앞에, 가을 햇살 맞으며 서 있는 풍광이 곱습니다.
조각 공원에 들러서 다양한 작품들도 보고
과학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어서 그런지
곤충, 생물, 기계적인 이미지들의 작품들도 종종 보입니다.
공원 구석구석을 나름대로 카메라에 옮겨 보았습니다.
과학공원으로 조성한 탓에, 건축물들은 우아한 외곽선 보다는 주로
수직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된 것들이 많더군요. 놀이터에 가보니
나무 우듬지를 이용해 미끄럼틀도 만들었고요.
걷기를 하다보면 혼자서도 잘 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때가 많아요. 자주 걸었을 공원의 길바닥도, 갑자기 내린
여우비에 살짝 물기를 머금으며, 회색의 짙음과 옅음이 조근하게 모자이크된
조형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놀이터에 가서 도르레도
돌리고 실로폰도 눌러보고, 발자국을 남길때마다,
다양한 소리가 나는 장치도 만져봅니다.
많은 이들이 프랑스 인상주의 시대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사람들이 걷고 있는
도시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간 작가들입니다. 흔히 플라뇌르라고 부르는 것인데,
'도시를 배회하거나 느리게 걷는 이들'이란 뜻이 있다네요.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도시 파리를
냉철하게 그릴수 있었던것도, 때로는 햇살아래, 미소띤 여인을
단아한 빛깔로 채색할수 그린 것도 '느리게 걸으며 포착한 도시의 정경'을
캔버스에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리게 걷는 것은 무한 경쟁의 속도에 맞서서
경쟁과 효율에서 한 발자욱 떨어져서, 생의 유장한 리듬을
복원시키려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공원 길을 나오는데 보이는 바람개비가 곱더군요.
코발트빛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맑은 가을 하늘의 여백 사이로
황과 연초록 빛깔로 만든 바람개비가 느릿느릿 바람의 향방에 따라 여린 동선을
그려갑니다. 오늘 하루 짧은 산책자의 마음을 채워주더군요.
서명숙 씨의 책에 나오는 올레는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란 뜻을 갖는
제주 토속어입니다. 거리와 내가 살고 있는 집 사이로 통하는 작은 길들의
풍경에는 어떤 삶의 빛깔과 무늬가 새겨져 있을까요.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성장과 효율이란
이름 아래, 많은 걸 잃어버린 우리들은, 집과 밖의 풍경을 연결하는 이 작은
길의 아름다움 마져도 찾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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