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지하철을 타고-길 위에서 길을 묻다

패션 큐레이터 2008. 1. 17. 20:33

 


구인성_횡단보도_종이에 수묵 채색_186×102cm_2006

 

오늘 기온이 -12도 까지 떨어졌다고 하네요.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일이 있어 서울역에 잠깐

나갔습니다. 털장갑을 손에 꼈고, 예전 겨울용 부츠를 신었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종종 걸음을 뛰어봅니다. 신산한 겨울 오후의 옅은 햇살이

내 마음 속 풍경의 빛깔 속으로 젖어들어 갈때 쯤.....초록불이 켜지고

힘겨운 도시를 뛰어다니라는 듯, 얼룩말 무늬를 한 거리의 이정표를 가볍게 넘어갑니다.

 



구인성_서울역_종이에 수묵 채색_210×132cm_2006

 

서울역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네요. 작가 구인성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누군가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그림 속에서, 예전 신인상파의 쇠라의 그림을 떠올립니다.

캔버스위에, 빛의 물성과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어낸 쇠라처럼

그는 농묵과 담묵의 점을 세세하게 찍어 염세적인 도시, 서울의 길을 그려냅니다.

그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작업을 하고 있지요. 수묵점묘로 그린 도시의 풍경,

마치 빗살무늬 햇살처럼, 그렇게 모였다 흩어지는 길 위의 사람들을

그려보고 싶었나 봅니다. 최근들어 한국화의 다양한 변신과 시도가 점점 좋아지네요.

 

전북, 부산, 청주, 여수, 장항

수많은 길의 갈래 끝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누군가는 추억을

머리에 이고, 누군가는 코트깃을 세운채, 무덤덤하게 사랑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구인성_지하철_종이에 수묵 채색_182×364cm_2006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시간의 격자 무늬에 새겨진, 지하철 내 사람들의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1863년 런던, 목탄을 태워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로 연간 950만명을 실어 나르는 최초의 지하철이

등장한 이후로 현재 42개국 102개 도시에서 승객을 나르고 있습니다.

과히 지하철의 시대가 아닐수 없지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연간 31억 8200만명을

수송한다고 하네요. 이번에 모스크바에 가면, 전철역 마다 걸린 그림과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들을

자세히 보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신보경_빠름과 망각_캔버스에 유채_90x220cm_2000

 

작가 신보경이 그린 <빠름과 망각> 은 지하철의 속도감에

그저 우리의 몸을 맡기고, 일상의 무게를 잊는 사람들의 표정들을 아련하게 잡아냅니다.

마치 깊은 땅 속에 한발을 묻은 듯, 편안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예전 연기공부를 할땐, 지하철은 아주 좋은 교과서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죠. 별별 시답지 않은 시비를 벌이거나

자리 싸움을 하는 사람들, "어디로 손이 들어와요"식의 성희롱까지, 각종 천태만상이

벌어지는 지하철은 제게 연기의 <길>을 지도하는 선생님이었던 셈입니다.

 

지하철은 지구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지하철 안의 나는  지하철과 같은 속도로 달려간다
내가 너와 같은 속도로 살아가고 
빛과 같은 속도로 죽어간다  다음 생으로 갈아타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나가는 이생을 향해 나는
지는 나뭇잎 같은 덧없는 손을 흔든다 


지하철의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떠다니는 먼지의 밀도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이고   
마음과 마음은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보다 멀다   
사람들의 얼굴에 열꽃이 핀다. 지하철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도독뼈를 씹듯 온몸 마디마디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지하철은 떠나간다
들여다보면, 그곳은 바람의 하수관 더러운 공기는 희미한 불빛과 뒤엉켜
시궁을 이루며 흘러가고 한번 가슴을 떠난 신음처럼,
지나간 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박후기의 <지하철 정거장에서> 전편

 

집으로 오는 길......날씨가 너무나도 추웠는지 약간 쓸쓸해지더군요.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하는 배가 이틀 뒤로 취항이 미뤄졌습니다.

아.....그리고 어제 중앙 선데이의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다음 호에 전문적인 글을 쓰는 파워 블로거를 선정해 집중 기사를 실을 예정이라네요.

제가 뽑혀서 기분도 좋고, 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자랑하진 않아도, 한 분야를 깊이있게 쓰는 블로거를

주로 선정기준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일 겁니다. 그 깊이의 외피와 내피를 아름답게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여행이 가까올수록 긴장과 함께 뭔가 털어내버려야 할 짐 또한 있음을

배우게 되네요. 잘 하고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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