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심청이는 살아있다-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패션 큐레이터 2007. 10. 20. 01:45

 

 

가을이 깊어갑니다. 가을은 온 대지에 과실과 곡류가 무르익어

그 시각성의 풍성함을 뽑내는 계절입니다만, 또 한편으론 그렇게 익어가는 사물들이

토해내는 소리들을 내면으로 깊이 들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청음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 때입니다.

 

엄마와 함께 한국의 창극 <청>을 보았습니다.

왠 창극(?) 하실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극을 공부해서

원래 연극과 오페라 혹은 현대무용과 관련된 공연은 자주 보러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현대화된 한국의 창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엄마를 모시고 국립극장에 갔습니다.

독자분께서 제 블로그를 보고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이 공연의 표를 사서 보내주셨답니다.

 

 

최근 국립극장에서는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습니다.

각 나라의 국립극장에서 국가 브랜드로서의 문화 상품을 기획하고 이것을 세계를 돌면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소개할 한국의 <청> 바로 심청전이 있습니다.

 

처음엔 창극이라 해서 약간 머뭇거리긴 했습니다.

대학시절 안숙선 명창에게서 한 학기 동안 판소리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단아한 모습에 반했던 대학4학년 졸업을 앞두었던 학생은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네요.

오늘 본 창극 <청>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전통적인 창과 판소리

혹은 <창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충분히 깨뜨릴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임권택 감독님의 <서편제>를 통해 판소리의 가능성에 대해서

배웠다면 이번 창극 <청>을 통해서는 창극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놀랐습니다. 솔직히, 이럴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을 정도였답니다.

원래 전통적인 창극이란 것이 청음에 기반하는 예술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전통은 연극의 다양한 면모들을 섭취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

꽃 피워나는 것이었습니다. 창과 연극 무용이 어루어진 한편의 종합예술로서의 <창극>이 완성된 것이죠.

 

이번 창극은 무엇보다도 서양의 현악기와 전통적인 한국의 악기들을

잘 배합하여 성음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리없이 들을 수 있고 의미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강한 연극적 에너지가, 청이의 통곡과 창을 통해서

극대화 되고,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옵니다.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집단 씬이 이렇게 촘촘하고 강렬하게 연출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습니다.

 

심청이는 자신의 이름처럼 푸른멍울이 진 바다위에

자신의 삶을 던져, 구원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눈을 위해 바스라듭니다.

 

 

무대는 서구연극의 방식을 빌어

원형무대와 7.5도 정도가 기울어진 경사 무대로 설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극에 빠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원형 무대를 쓰게 되면

우선 동선의 깊이가 커지고, 극적인 감정의 표현이 더욱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거든요.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과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에서 사용된

원형무대는 감정의 극대화를 넘어, 숭고한 미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문화 혹은 그 문화상품의 가능성을

이야기 할때 '정한의 세계'라는 식의 협착한 느낌을 자꾸 남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맨날 한국적 '한의 구조나 정서'라는 도식에 빠져서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비장미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타자를 구원하는 숭고미의 세계를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미지로는 올리지 못하지만,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하늘에선 꽃비가 내리고 그 위를 서서히 발자욱 하나하나 찧으며 걸어가는 그 모습에서

씻김의 의미와 그 속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의미 또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역시 심청전 하면 뺑덕어멈이 빠질수 없지요.

그녀는 이번 창극에도, 결국 현대화된 우리들의 극적 형태에서도

그 멋진 매력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난 후 청이는 다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이런 극의 구조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사실 심청전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수동적이고, 간택당하는 여인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남발되거든요. 하지만 이번 창극에서는 그녀를 주체로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다시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업으로 받은 사회적 지위를

버리는 모습을 과감하게 연출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의 보편성은 이제 한국적 <심청이>의 가능성을 넘어

세계에 보편적으로 울림을 만들수 있는 이야기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고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죠.

 

 

오늘에서야 알았지만 해오름 극장의 벽면이 너무 곱더라구요

가을을 맞아 엄마와 함께 한 극장 나들이에서

한장 예쁘게 찍어드렸습니다.

 

심청이와 같은 효녀는 아니지만, 사실 저는 엄마에겐 잔소리꾼입니다.

오늘도 공연 보러가기 전에 엄마에게 동대입구에 있는 유명한 족발집에서

족발을 사드렸습니다. "엄마 족발이 콜라겐이 많아서 피부에 무자게 좋아요"

이러고 다닙니다. 일흔이 넘은 엄마가 아직도 제게는 예쁩니다. 저는 팔불출입니다.

엄마......행복하세요.

 

오늘은 김애라의 해금 연주로 듣는 Moon River 입니다.

푸른 달빛이 마음의 강 한구석을 유유하게 흘러갑니다. 해금이 있기에, 유키 쿠라모토의 피아노가 있기에

이 곡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요. 멋진 주말 보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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