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기자라는 변태집단-국립무용단의 외설논란에 대하여

패션 큐레이터 2013. 4. 13. 19:27

 


밥먹고 살기 힘든 기자들에게


지난 수요일 국립무용단에서 올린 <단>을 보고 왔다. 공연 전, 남산의 국립극장 관리동 4층에 있는 무용단 연습실에 들러 전막을 봤고 안무를 맡은 안성수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온 터였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씨가 연출과 무대, 의상을 맡아 색다른 지평의 공연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10일 첫 날 공연을 보러갔다. 앞줄에서. 안무가 안성수는 현대무용을 했다. 그는 누구보다 무용수들의 몸을 아름답게 선보이는 논리를 알고 있는 안무가다. 무용은 연극과 달리, 철저하게 무용수의 몸을 통해 세상과 통어한다. 이번 공연은 권력의 상징인 <단>을 무대로 한 그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안타깝게도 이번 포스팅은 공연 리뷰보다, 공연 이후 일부 몰지각한 언론이 보여준 작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소회하는 자리가 될 것 같다. '가슴이 보일락 말락, 국립무용단 공연 외설논란 시끌'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국민일보의 기사를 보라. 인터넷 조회수로 목숨거는 언론의 양상을 보여준다. 조소를 넘어 안쓰럽다. 작품의 연습과정을 지켜봐온 나는, 프레스콜 때도 기자들이 하나같이 단원들이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상의를 벗은 채(철저하게 두 손으로 가려 가슴도 보이지 않는다) 나오는 장면에만 플래시를 터트리는 걸 봤다. 사진 기자들 눈에는 이 장면만 보였던 것이다. 채 2분도 채 못되는 주요장면도 아닌 이 장면이 말이다. 


사진 한장 올려놓고, 외설논란을 운운한다. 웃기는 건, 공연을 본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도 없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더니 사람들이 이러더라, 이런 식이다. 무용단도 프레스콜 때 사진기자들에게 이 장면만 하이라이트로 부각하는 것은 피해달라고 당부했으나, 언론은 조회수를 올리는데,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작품 전체에 대한 맥락 무시는 물론, 기본적인 해석도 없고, 그 장면이 왜 삽입되었는가에 대한 치밀한 이해도 없다. 그냥 한 장면을 따서 써먹는데만 혈안이 된 것이다. 놀라운 건, 왜 홍보담당자가 이런 부분을 당부했을까 하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맨날 이런 장면만, 눈에 보여 문제를 삼아 온 것이 누적되서다.



지겨운 외설논란을 넘어서


사실 언론이 이런 식의 작품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추어 쓸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수사가 바로 '외설'이란 단어를 삽입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종교와 권력의 상징인 제단을 소재로 한다. 인간의 예술이 원시시대의 집단제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주장이 있을 만큼, 단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제천의식들은 오늘날 현대에서도 여전히 보이는 삶의 양상들이다. 3막 9장으로 된 꽤 긴 작품인데, 극의 전개에서 색채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초록색과 붉은 색의 보색 대비는 동양을, 검정과 백색은 동서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세상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검정색을 시작으로, 여기에 보색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충돌하고 포개어져 하나가 된다. 음양과 동서양, 내면과 외면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태평소를 이용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나위와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차용한 음악이 교차되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일보가 외설을 운운한 상의 탈의 장면이 잠깐 나온다. 초록빛 무대가 주가 되고, 빨강색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살짝 그 사이로 교차된다. 그뿐이다. 



수백개의 형광들이 겹을 이뤄서 무대를 비춘다. 안무노트를 보니 이것은 달빛이라고 했다. 그 아래 무용수들은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군무를 보여준다. 무용수들의 질서정연한 배열은 마치 빈 무대에서 그림을 그리듯, 4열로 시작한 도열은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를 반복하며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영화연출과 안무를 경험한 무용수답게, 안성수의 안무는 기존의 무용과는 차별화된 특색들이 나타난다. 무용수들의 몸은 일종의 벽돌이 되어, 의미란 한 채의 집을 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좋은 안무가인 이유는 음악을 분석하고, 그 악보위에, 무용수의 몸이란 보표를 담는 기술에 있다. 인간의 신체가 빚을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연장하고 끊고, 혹은 곡절시켜야 하는지 안다는 뜻이다. 안무가라면 기본 아닌가?라고 묻겠지만 세상엔 의외로 그런 안무가가 드물다. 


난 무용에 대해서 글을 쓸때는 철저하게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동작의 미감에 주목한다. 작은 움직임이 누적되면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무용에 드라마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거나, 사실은 무용을 전혀 읽을 줄 모른 채 그저 아는 척 몇 마디 하고 싶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에포트란게 있다. 무용을 하는 이들은 다 아는 용어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무용수의 몸을 통해 재현된 에포트의 내면을 읽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동작의 심리적 동기를 뜻하는 에포트는 항상 흐름과 무게, 시간과 공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이게 만만치 않다. 읽을라 치면 사라지는게 인간의 몸이고 동작이다. 특히 이번 작품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발레의 사위가 결합되어, 혼합된 가운데서 정제된 메시지를 골라 읽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있었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보는 것 보다 머리만 채워서 공연에 대해 쓰는 이들이 있다. 무용에 대해서 쓰기 보다 철학자를 인용하여 그의 철학으로 볼때 뭐 이러면서 지면을 떼우려고 든다. 공연을 보는 눈이 없어서다. 전문성도 부족하고. 오늘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점차 언론이 저널리즘적 예술비평을 포기하고 있음을 질타하기 위해서다. 전문기자들을 키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자신이 해온 고유 영역이 아닌 다른 분야까지 덤으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미술이나 음악, 공연, 패션 그 어떤 부분에서 전문화된 올바른 시각의 기사들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물론 이런 제목의 기사만 편집하여 보여준 포털에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포털에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고, 그들의 입맛에, 조회수 전쟁을 벌이다보니 강한 단어를 쓰는 기사들이 연일 메인에 오른다. 


인터넷 매체들이 늘어나면서 언론 매체들의 상호간 경쟁이 심해진 것도 한몫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통속과 선정성이란 유혹에 빠지는 걸 마냥 옹호해줄 수도 없다. 무용수들의 몸짓에서 당신의 눈을 끈 것이 상의탈의를 한 장면 하나 밖에 없었냐고 묻고 싶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당신은 공연을 취재할 기본적인 태도부터 갖추지 못한 사람일 것 같다고, 함부로 예단하게 될 것 같다. 전체적인 맥락은 깡그리 사라지고, 포털 사이트에 송고할 선정적인 기사 제목이나 뽑는 그런 기자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걸 황색언론이라고 부른다. 좀 더 달라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