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길을 걸었습니다. 한성대 입구 6번 출구에서 나와 원래 가려던
커피 전문점이 있었는데요. 아쉽게 본점을 닫고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더라구요.
사진을 찍은 곳은, 길을 걷다 발견한 정말 작은 티 카페에서 찍은 것입니다. 주인장이 직접
찍어주셨어요. 이날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딱 저와 주인장, 저의 동행친구
이렇게 세 사람이 밤 11시까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졌어요.
첫 만남에 이러기 쉽지 않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겠지만요.
박원순 시장님이 서울을 보행도시로 만들 좋은 계획을 발표하셨다네요.
시장님의 정책 발표문을 보니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요. "도시란 이야기 책이다. 걷기란 언어를 통해서만 해석이 가능하다"란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저는 뚜벅이의 삶을 살면서도 한번도 지쳐보지 않았던 것은, 느리게 걷기에 몰입하
며 주변의 풍광들을 담다보면, 의외로 이 부산한 도시 속 경관 내부에, 내밀한 즐거움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성북동 길도 그런 요소를 많이 갖고 있죠. 특히
길상사 가는 길 말이에요. 가로수길 처럼 개발하기 보다, 특화된 보행자
중심 도로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즈넉한 느낌으로.
티 카페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하여튼 이날
주인장께 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냥 카페를 하기 위한 기초지식
정도의 수준을 넘는 분이었습니다. 여쭤보니 세계의 다양한 티를 컬렉팅 하는 분이기도
했고, 그 지식을 위해 다양한 여행을 다닌 작가분이더라구요. 곧 책이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J's Tea House란 이 곳의 주인장은 사진도 참 잘 찍습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을 전공했던
모양인데, 여행을 좋아해서 몽골연구를 위해 6년간 여행을 다녔고,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디테일과
색감이 선연하고 뛰어납니다. 첫 만남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고 느끼고 왔습니다.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에 온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이었어요. 주인장 자체가
운영하면서도 쉬지 않고 차를 마시기에, 시음할 기회가 많습니다.
제가 이날 마신 차는 버니 스노우(Bunny Snow)란 차였는데요.
이곳이 유기농, 오가닉 티만 파는 곳이여서 차 이름 밑에 붙은 부제들을
읽는 재미도 있습니다. "차가운 겨울 따스하게 손을 덥혀줄 차"라고 해서 마셨어요
느낌이 진하고 뭔가 견과류가 송송 박힌 빵과 마셔야 할 것 같은 감성이에요. 실제로 차는
버터향이 나는 듯 합니다. 어린시절 버터스카치 사탕을 먹는 듯한 향인데요. 레시피를 보니 바나나와
월넛, 카렌듈라라 불리는 금잔화 잎파리를 넣은 블랜딩 차입니다. 묵직한 느낌이 목을 넘기면서
온 몸에 전해지는데, 온 몸이 따스해 지는 느낌이에요. 제 지인이 마신 건 블루베리 잼
이란 오거닉 티에요. 블루베리에 파라과이산 국화인 스테비아 잎파리, 여기에
진청색 수레국화를 넣어 만들었는데요. 그 향이 블루베리의 특유의
힐링의 힘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첫 만남, 첫 장소에서
이렇게 티를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티를 담는 컵도 본인이 직접 그려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원래 글 쓰는 것과 여행을 좋아하는 분 답게, 초면에도 마음을 쉽게
열고, 저 또한 여행을 좋아하는 족속답게, 저도 마음을 열고 정말 즐거운
수다를 떨었습니다. 차에 대해 배웠고요. 이 주인장이 제가 보기엔 진짜 차에 대해
큐레이터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우리시대가 지식의 큐레이션이 필요한 시대이고
뮤지엄에서만 일하는 학예사를 큐레이터라 부르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일상의 행복을 위하여
지식을 풀어갈 수 있고, 그 지식을 편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서와 타인을
맞는 태도마저 가질 수 있어서, 사람들의 감성에 조응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멋진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맨날 말로만 감성사회가 어쩌고 말고요.
빨리빨리란 단어, 속도전이란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듯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죠. 역사적 유물처럼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 사회는
더욱 속도를 요구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몸을 새롭게 조형하느라 매일 아파야 하는 사회
입니다. 이럴수록 걸어야 하고 산책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뇌의 작용으로 도시를, 나를
둘러싼 이 사회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제일 부러운 것이 동네
곳곳에 있는 공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산책을 워낙 좋아한 탓이라고 하지만
더 멋진 건, 러시아말로 산책이란 단어는 '사유한다'라는 뜻이 함께 있다는 것이
놀라왔습니다. 느리게 걷기란 언어를 통해, 도시의 포도 위를 걸으며
그 위를 걸어간 다른 타인들의 향을 느껴보는 것. 차를 마시는
것과 걷는 것은 이래서 하나로 통일이 되나 봅니다.
한 잔의 차, 한 잔의 여유란 이런 것이겠지요. 행복한 저녁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몸도 한켠 쌓였던 왠지모르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처들이 조금씩 녹은
느낌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 타인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의 예배라면, 따스한 차 한잔, 몸을 덥히는 이 시간 속 행복도 분명
그 만남이 주는 오롯한 선물이겠죠. 찻집에 다녀와 기분좋아 포스팅을 해보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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