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북유럽을 읽는 색다른 코드-쿨베리 무용단의 춤을 읽는 시간

패션 큐레이터 2012. 10. 15. 06:00

 

 

북유럽을 읽는 색다른 코드, 춤

10월에는 셀수 없이 많은 문화/예술관련 행사들이 열립니다. 한편으론 행복하기도 하지만, 공연과 전시, 쇼를 보고 리뷰를 해야 하는 입장에선 스케줄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연을 보고 생각을 곰삭일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죠. 서울국제무용페스티벌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20일까지 진행되는 행사는 올해로 15년째입니다. 아는 분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현대무용을 주제로 하다보니, 무용이란 생소한 영역을경험하고 즐기는 분들은 극소수입니다. 발레와 달리 이해가 쉽지도 않고요.

 

이번 서울국제무용페스티벌의 개막작은 스웨덴 출신의 쿨베리 무용단의 작품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요즘 북유럽이 대세라고 하죠. 자연과의 동화된 삶을 기조로한 단순하고 따스한 디자인. 핀율이나 야콥슨의 가구에서 시작하여 마리멕꼬의 직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내부의 디자인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패션을 비롯한 다양한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알기 위해선, 적어도 심층깊은 이해를 하려면 한 당대, 그들의 움직임을 읽어야 합니다. 몸에 체득된 무의식적인 움직임의 방식이지요.


 

제가 무용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요즘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빌보트 차트 1위를 향해 달리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왜 그들이 반복적인 웃음코드가 발현되는 싸이의 몸짓에 끌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반복적인 말춤의 동작이 무엇보다 따라하기 쉽죠. 따라붙은 가사 속엔 한국사회의 한 측면을 지적하는 내용도 담기지만, 사실 시각적으로 가수의 액션을 소비하는 입장에선 노래의 내용보단, 동작의 접근가능성과 웃음코드가 더욱 끌릴 것입니다. 예전의 마카레나 춤처럼 말이에요. 싸이의 활동을 보면서 한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도 좋지만, 한번에 일희일비하기 보단 우리 문화예술 전반의 체질을 높여서 지속성있는 유행의 코드로 녹여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웨덴의 쿨베리 무용단의 작품들은 제게 많은 생각의 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1967년 안무가 비르깃 쿨베리가 창단한 쿨베리 무용단은 이후 스웨덴 공연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며 자국의 문화를 몸으로 읽어내는 작업들을 해왔습니다.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과 현대발레의 결합을 보여준 것, 나아가 서유럽의 고전 작품들을 현대적으로, 팝과 힙합, 발레 등 다양한 춤의 방식을 결합시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무용공연니 소수의 관객을 위한 '자기들만의 잔치'인 경우가 많은데 반대, 쿨베리 발레단의 작품은 유튜브를 비롯한 SNS를 통해 조금씩 맛볼 수도 있고, 두터운 팬층도 확보하고 있죠.

 

수십 개의 테이블 위에서 집단춤을 선보이는 쿨베리의 작품제목은 <40미터 아래>입니다. 유튜브로도 동영상을 보실 수가 있고요. 무용작품을 안무한 곳은 다름아닌 원자력 발전소의 지하 내부입니다. 그 속에서 무용수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상징하는 소형의 테이블을 갖고 그 위헤서 일종의 아크로바트를 만들어내죠. 테이블은 서로 연결되며 일종의 거대한 식탁이 되거나, 마치 제조공장의 컨베이어벨트처럼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 위로 인간의 몸을 던지거나 요리 재료처럼 집어넣고 밀어넣는 동작들이 지속되죠. 의미를 굳이 철학적인 평론 언어를 빌려다 풀지 않아도, 무용수들의 집단화된 몸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스펙터클이 됩니다.


 

위 사진은 <공연 중>이란 작품인데요. 이 작품도 흥미로운게 공연때마다 무용수 개인의 동작들이 변화하고 일종의 즉흥극 형태로 공연을 준비하는 무용수들의 마음을 담습니다. 특정한 훈련, 악보처럼 동선의 규칙을 정리해 놓은 무보 상의 기계적인 훈련된 움직임이 아납니다.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런 몸의 움직임이 선연하게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요. 한층 가볍게 관객들에게 다가가지만 공연이란 하나의 실체에 대해 '몸을 통해 풀어내는 해석학적 사유'는 대중성과 깊이 모두를 획득합니다.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랜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국가의 디자인을 공부할 때마다, 디자인이나 미술, 문학, 무용 모두 서로에게 빚을 지고 연결되어 있음을 배우는 일입니다. 한국사회는 유독 유행코드를 따와서 답습하고 차용하기 바쁜 사회였습니다.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적어도 이국적인 것을 수용해서 우리의 것과 결합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의 습속이 쉽게 박혀있었기 때문이지요. 외국문화를 수용하고 향수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우리 문화 속에 하나로 포섭되지 않을 것이라면, 이는 그냥 대중문화적 소비, 백화점식 소비와 다를게 없습니다.


 

북유럽에 대한 인기는 날로 높아지지만, 표피만 소비하고 있는 요즘.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단순히 유럽의 발레나 현대무용이 아닌 그들의 정서가 인이 박혀 나오는 동작임을 배웁니다. 물론 이를 우리 각자의 영역에 끌어들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사용하려면 또 시간이 걸리겠지요. 외국의 모 블로그에 갔더니 그 분은 하몽을 만드는 걸 익히는데만 오랜 시간을 들였더라구요. 곰삭임은 곧 인내입니다. 돈 될 것만 찾아서 팔아먹고 모른척하는 문화, 그런 세대 속에서 이 코드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분들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겁니다. 내공이 없이, 내것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만 시간차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죠. 

 

우리는 다시 우리 안에 가득차있는 '미래의 코드'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을 읽는 시간은 단순히 예술적 퍼포먼스를 경험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래서 여전히 이곳에서 인기없는 무용을 손에서 놓질 못하고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