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회장님의 막힌 귀를 뚫는 법-연극 인물실록 봉달수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3. 15. 10:39

 

 

 

초록이 조금씩 얼굴을 내미는, 환절기의 시간. 혜화동에 나갔습니다. 배우 윤주상 선생님이 출연하는 연극 <인물실록 봉달수>를 봤습니다. 송영창과 더블 캐스팅으로 나오셨는데, 두 분 다 제게는 익숙한 배우이고,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예전 국립극장에 공연을 보러 가는 길, 저녁 어스레한 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배우들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 계신 멘토의 목소리였죠. 윤주상 선생님이셨는데, 워낙 목소리가 좋으셔서 저도 엿들었답니다. 선생님 연기야 워낙 좋으니 믿고 본 연극인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무엇보다 마음 속 추운 한기를 따스하게 안아준 작품이었습니다.



연극 인물실록 봉달수는 심각한 혹은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작품이 아닙니다. 보청기와 전문 의료기기를 파는 대그룹의 회장님이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회의석상에서 목소리를 높이다가 쓰러진 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자서전 집필을 생각하게 됩니다. 비서를 통해 국내 최고 작가를 불러오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글에 관한 한 까다롭기로 소문난 여자작가 신소정은 호락호락하게 회장이 원하는 방식의 집필을 해주지 않는 것이죠. 급전이 필요해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위해 대필을 한다는 건 문학적 자존심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격이 불같은 두 사람, 이후의 이야기는 뻔한 노선을 걷지 않겠습니까? 티걱태걱, 마치 1930년대 헐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메디를 보듯, 만날 때마다 의견충돌을 빚던 이들은 어느새인가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게 되죠.


 

글쓰기란게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사람. 최근 트위터로 종종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국 최고의 인터뷰어인 지승호 선생님의 책을 종종 읽어봅니다. 김어준 총수의 <닥치고 정치>도 최근에서야 읽었네요. 인터뷰란게 참 만만치 않습니다. 영어단어로 살펴보면 Interview 입니다. 두 개의 틈새를 오가는 시선이란 뜻입니다. 라틴어로 이 인터뷰를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콜로키엄(colloqium)입니다. 학문적인 발제를 하고 견해를 나누는 모임이죠. 학문적인 세계이든, 혹은 개인적인 세계이든 중간계에 위치한 인터뷰어는 인터뷰에 나온 이의 정서에 공감하되 거리를 두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세계는 곧 나의 세계로 침투하고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되기도 하죠.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나 글로 완성될 때, 인터뷰는 끝이 납니다.

 

 

자서전이 완성되어 가면서 조금씩 마음을 여는 봉달수 회장. 그는 자신이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슬픈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를 되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성장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번 연극의 연출을 맡은 주호성씨의 노트를 읽어봤습니다. 가수 장나라씨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죠. 그는 이번 연극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소통 부재의 시대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연출노트에 곰삭여볼 만한 말이 있어 인용합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한문 문화권에서 쓰는 단어 중에 來意 (래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뜻이 내게 도착하였다', 너의 뜻을 알겠다' 정도로 직역되는 말이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한문을 중시하던 시대에 썼음직한 이 단어가 왜 우리나라 현대에는 쓰이지 않을까? 혹은 불통의 시대라 '너의 뜻이 내게 왔다'는 의미자체가 필요없어 소멸된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걱정을 해봅니다" 저는 이 노트를 읽으며 많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극중에서 아버지에게 맞아서 어느날 고막이 터져 한쪽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어머니를 위해, 보청기를 만들고 싶은 기술자 봉달수, 그는 어려운 삶을 관통해 오늘날 최고의 기업을 가진 회장님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헌신하는 아내가 있었고,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꿈을 펼칠 수 없는 딸이 있습니다. 서로의 뜻이 각자에게 도달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겠죠. 소통에 대한 갈망도 큽니다. 소통기술을 가르치는 이들도 부지기수지요. 그러나 이와 반대급부로 달려가는 사회의 양상은, 우리 시대 소통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정치 지도자, 사회지도자와 아내, 딸, 아버지, 계층과 성별을 막론하고 의미가 도달하기 전까지 이를 가로막는 잡음과 벽들이 있습니다. 벽을 허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벽부터 허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좌나 우나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이것을 채택해야만 소통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일방적인 통행일 것입니다. 그/그녀의 의미가 내게로 오려면, 나 또한 그 의미를 포획하기 위해 내 마음을 열어야겠지요. 강정마을, 선거 등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소통의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겁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고민합니다. 내 언어가 누군가에게 도달하고 있는지 걱정하게 되고요. 더욱 귀기울여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