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여성가족부를 위한 한 장의 그림

패션 큐레이터 2011. 8. 22. 06:00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99 x 162cm, 우피치 미술관

 

여성가족부, 왜 여가부라 불릴까?

 

동기 여학생을 돌려가며 성추행한 의과대학생들에 대한 치리를 민족 고대가 머뭇거리고 있다. 고대답게, 들끓어오른 여론이 잠들 길 고대하는 것인가? 한심하다. 문제는 성추행을 둘러싼 국민적 여론에 반해, 이 문제에 관해 목소리를 내야 할, 여성가족부는 묵묵부답이다. 피해 여학생에 대한 구제나 법적 행사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대중문화 속에 침윤된 '술'이란 단어에만 집착한다. 이 정도면 알콜중독 클리닉 수준이다. 이번 성폭행의 원인 중, 술이 매개되었단 점을 내세워 '근본적인 치유'방법을 찾고 싶은 것일까? 장기적 관점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안에 대한 여가부의 행태는 마뜩치 않다.

 

동기 여학생 성폭행 사건은 가해자 부모가 비싼 변호인단을 구성, 유리한 법적 고지를 차지하려고 혈안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가 큰 쪽은 성폭행을 당한 해당 여학생이다. 고려대는 출교가 아닌 퇴학으로 의대생 자격을 재 부여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여성가족부는 왜 이 사안에 침묵할까? 그들의 애칭인 여가부처럼, 부르주아 여성들의 정치적 자유와 결사만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때문인가? 그들은 여가시간에만 움직인다는 뜻인가? 농담으로 하고 싶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농담처럼 되어간다. 일반 시민의 성폭행에 대해선 목소리를 내면서, 자칭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의 성폭행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꼭 다물까? 툭하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란다. 이런 이중잣대를 만들고, 행정과정에 투영시켜온 여성가족부다.

 

그림 속 과부인 유디트는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처절하게 자른다.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유독 남자를 응징하는 여자의 이미지를 자주 남겼다.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제자였던 이에게 강간을 당했던 상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강간하고 추행한 인간의 이미지를 지우기 보다, 철저한 대응으로 일관하며 버틴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림 속에 담긴 사연일 뿐이다. 정작 같은 일을 당한 여성이, 그림 속 마술처럼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정서적인 충격을 평생 감내하며 살아갈 여학생에 대해, 여가부가 제대로 된 판단과 후속조치를 내려주길 기대하는 이유다. 제발 여가만 즐기지 말고.....

 

여가부, 알콜중독 클리닉 대신 지속적인 모니터를.....

 

여성운동은 혁명이 아닌 누적의 역사를 보여준다. 여성이 남성의 가부장제에 맞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까지, 그들의 움직임은 미세하고 작지만, 끊임없이 남성중심의 역사를 반성하며, 일상의 차원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왔다. 일상 속 내부규율과 관점을 세우는 일이고, 이것이 성의 차별없이 이뤄지도록 끊임없이 모니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성가족부는 이런 모니터의 방향을 오로지 '술'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포커스는 잘못되어 있다. 최근 여성부는 김수철의<고래사냥>을 19금으로  선정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에서 술이란 단어가 삽입되었기 때문이란다.

 

포커스란 단어의 라틴어를 찾아보면 그 의미가 독특하다. 화로란 뜻이다. 집안의 중심을 이루는 불의 둔덕이다. 방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음식을 만드는 핵심공간으로서의 화로다. 우리가 흔히 '포커스를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사안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다. 우선순위부터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데이트 강간을 비롯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일상적 차원에서 부터 철저하게 치리해야 한다. 이런 법적절차가 일상으로 편만하게 퍼지면, 행동을 규율하는 마인드도 변한다.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만 해내야 한다. 때로는 특정 사건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사회적 동의도 구하고, 거울이 될 만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내야 한다. 파급력과 더불어 사회적 인식을 얻기 위한 전략이다.  여가부는 성폭행이란 화두가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모니터를 포기한 것일까? 포커스의 화로 속에, 자질구레한 것들을 태워버리고, 정말 중요한 것들을 붙잡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여성부의 태도는 이 점을 놓치고 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잔나와 그 장로들> 1610년

캔버스에 유채, 바이스슈타인 성 소재

 

 

술 권하는 사회, 그 속살의 상처를 생각하며

 

지난 14일 그룹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백지영의 ‘아이캔드링크’, 박재범의 ‘Don's let go’와 애프터스쿨의 ‘펑키맨’, 허영생의 ‘Out the club' 등의 노래가 청소년 유해매체물이라고 공식발표했다. 문제는 유해 유무를 판정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것과 이 또한 청소년보호법의 규정을 따른다는 것인데, 그만큼 청소년 관련 부서에서 한 것이라고 발뺌하지만, 이 또한 여성부의 소속이다. 여성과 청소년, 가족 등 부서의 덩지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의제와 주체들을 훔쳐왔던가? 방만한 규모를 갖게 되었으니 길을 잃는 건 당연하다. 기준도 없고 포커스도 없다.

 

'술'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문화적 생산물의 전체적 맥락이나 의미에 대한 이해없이 무조건 19금으로 선정하는 행태는 사뭇 이해하기 어렵다. 동기 여학생을 성추행한 학생들이 돌아왔을 때, 피해 여학생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고려대의 행정적 작태도 우습지만, 중요 사안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고 행정력을 '벼룩'을 잡는데만 사용하는 여성부도 웃긴다. 20세기 초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치 경제상의 난맥상에 대해선 눈감고, 오로지 금주법이나 관철하려던 시대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여가부의 행태는 현 정권의 '성폭행과 추행'에 대한 정서적인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성추행과 폭력에 관대한 자들. 정권의 속성이 여성의 삶을 담보해야 할 마지막 보루인 부서까지 침윤된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들의 행태는 그 어느 행정부서보다도 가부장적으로 보인다. 술 권하는 사회를 재현하는 단어에 매이지 말고, 현실에 좌절하고 상처받은 고대 의과대 여학생 같은 이들을 둘러싼 법적 치리를 잘해야, 술을 자발적으로 끊지 않겠나. 도대체가 풀리는 건 없고, 한 순간의 시름이나 잊으며 살라고 하나, 이런 거대 구조를 만든 것도, 아니 동조하는 것도 말끝마다 가부장의 해체를 떠들어온 여성부가 아닌가?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젠틸레스키의 두 번째 그림인 <수잔나와 장로들>을 보자.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중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몸서리친다. 성서에 나오는 나온 수잔나란 여인의 예화를 그린 것인데, 내용은 두 명의 장로에게 강간을 당한 유태여인 수잔나를 다룬다. 목욕하는 여인에게 다가와 금전적 제공을 해줄테니 성관계를 갖자고 하는 양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란 말이 떠오를 수 밖에. 거절한다면 유대법에 따라 돌로 쳐죽일 것이다. 남성의 강간과 성폭행에 대한 일침을 위해 당시 희귀했던 여성작가는 이런 주제를 다룰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여전히 강간과 관련된 법정 소송은 지난하고 힘들었다. 종종 강간사건의 귀결은 피해자와 결혼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것이 여자의 잃어버린 명예와 미덕을 회복시켜주는 방법의 일환이라 믿었다니, 남자들의 더러운 근성은 그때나 또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헛짓을 그만두고, 핵심을 잡아라. 알콜중독 클리닉은 의료 서비스와의 협업 정도로 남겨두면 안될까? 권력과 돈을 가진 자의 성폭행에는 눈을 질끈 감는 이중 잣대야 말로 여성가족부 스스로 내부적으로 고쳐나가야 할 점인 듯 하다.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을 오늘 BGM으로 골랐다. 비는 그쳤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쑥물 든 비가 내릴 고대 피해 여학생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정말이지 여성가족부가 내게(너무나도 술에 약한 내게) 술을 권하고 있다......

 

 

 

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