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레시피는 블로그를 타고
영화 <줄리 & 줄리아>는 블로그에 관한 영화다. 적어도 난 그렇게 읽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시간대를 다룬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이야기 구조는 영화적 구성의 단골로 자주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마치 한 화면 속에 '두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도록 연출하는 '극 중의 극' 기법은 이미 17세기 프랑스의 몰리에르 극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재미있고 신선하다.
영화를 보는 시종일관 너무 행복해서, 영화 속 주인공에게 흠뻑 몰입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요리 블로거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내 안에 있어서다.
영화는 1940년대 후반의 프랑스와 2000년 초반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줄리아 차일드는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간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지만, 겅중맞게 큰 키와 특유의 말투, 낙천적인 성격으로 프랑스에 안착한다. 그녀는 코르동 블루에 다니며 평소부터 익히고 싶었던 프랑스 요리에 빠지게 된다.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 책이 한 권도 없도 시절, 그녀는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한 유럽의 한복판, 프랑스 요리의 레시피를 책으로 만든다. 책이 출간되기 까지 꽤 고난한 과정이 그려진다. 이제 2000년 초반으로 타임머신은 옮겨온다.
대학 재학시 가장 잘 나가던 교지 편집장으로 성공 가능성 1순위를 타진하던 여자. 줄리. 그러나 삶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뉴욕 퀸즈지역의 소음을 견디며, 살아가는 그녀는 9.11 이후의 사후처리를 위한 정부 부서의 임시직 공무원이다.
그녀의 취미는 요리, "세상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나 요리는 확실하다, 크림과 버터와 머쉬룸을 넣으면 멋진 버섯요리가 된다는 진실을 믿는 그녀. 줄리아의 <프랑스 요리의 달인이 되는 법>에 나오는 524가지 레시피를 1년 동안 시도해 블로그에 올린다. 이후의 스토리야 뭐 말할 필요도 없이 해피엔딩이 아니겠는가.
S#2 견고한 모든 것은 요리 속에 용해된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용해된다'란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렸다. 자본론은 초기 자본주의의 병폐가 치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봤다. 이 영화에서 요리는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하고, 비루하고 답답한 현재의 생에 활력을 불어넣는 힘이다. 영화 초반, 줄리의 친구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모여 수다를 떠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같이 성공적 캐리어를 자랑하며 줄리를 압박한다. 멋진 소설을 쓰고 싶어서 오랜 시간을 방황했던 그녀는 블로그를 통해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블로그는 현대로 옮아온 자본론이다.
영화 속 두 개의 시간대에 걸친, 사회적 사건이 눈에 걸렸다. 메릴 스트립(줄리아)이 살던 시대는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즘(맹신에 가까운 정치적 보수주의)의 시대였다. 정부 공무원으로 중국에서 일한 것 조차 시비를 거는 시대. 말 끝마다 빨갱이(reds)란 표현을 서슴지 않으며 극단적 애국주의를 표방한 시대. 남편과 함께 공무원으로 일했던 줄리아도 이 속에서 고초를 겪는다. 다시 2000년 초 9.11 테러는 미국 사회전반에 보수 우익이 창궐하는 연결핀 역할을 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군사적 제국주의는 한계에 도달했고, 외부로 모든 감정의 상처를 토해내야 했던 시대. 이때 등장하는 것이 '빨갱이'의 색출이다.
50년이 넘는 시대의 격자무늬를 관통하는 정치적 이념의 동일성이 놀랍다. 어느 시대나 반복되는 보수의 놀라운 고집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환멸과 상처의 시대를 넘는 '따스함의 힘'이다. 걸망스러운 느낌, 겅중맞게 큰 키, 쩍 갈라지는 목소리 톤을 가졌던 줄리아에게, 프랑스는 가장 후각적이고 미각적인 도시였을 뿐. 만혼인 탓에 아이가 없어 답답 했을텐데(적어도 그 당시 풍토로선) 그 어떤 사회적 압력이나 정서적 상처도, 요리가 주는 행복감을 넘지 못한다. 이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줄리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댓글에 기뻐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10년 전 블로그를 시작하던 내 모습이다.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그녀에게서 블로그 공간의 힘을 읽어본다. 소통을 꿈꾸며 시작한 작은 움직임이 온라인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중요한 건 그녀가 줄리아의 레시피만 올린 게 아니란 사실이다. 자신의 사인적 이야기들, 일상에서 겪은 상처와 작은 아픔들이 녹록하게 젖어나오는 것. 블로그란 1인칭 매체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나 또한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S#3 블로그는 기적을 요리하는 그릇
1인칭 시점의 글이 주는 매력은 독자와 저자의 감정적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다. 글의 집필 과정을 보여주는 교차편집 상의 화면엔, 시대를 관통하는 글쓰기의 면모가 녹아난다. 결국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첫 책이 나올 때의 기쁨과 환희,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6년 동안 자료조사를 하며 썼지만, 원래 출간하기로 한 출판사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고, 부랴부랴 다른 출판사를 찾아 전전긍긍해야 했던 모습은, 영화 속 메릴 스트립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눈물이 더 흘렀다. 나 또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블로그와 책으로 사랑을 얻었다.
결국 블로그도 글을 담는 그릇이다. 난 어떤 요리를 담아낼까? 영화 속 뵈프 부르기뇽은 엄두를 못내겠지만, 따스하게 떠먹을 수 있는 닭고기 스프 정도는 해 낼수 있을 것 같은데......실습이 필요하지 싶다. 중요한 건 요리를 담아내는 마음이리라. 그것을 먹는 이들을 생각하고 최상의 재료와 레시피를 개발하고 싶은 이들을 통해, 블로그는 발전한다. 일상이 기적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영화. 왜 이런 영화가 상영관이 적은 것인지, 속이 팍팍 상한다. 메릴 스트립은 연기 기계다. 두손 두발 다 들게 하는 그녀. 또 보고 싶다.
아래 View 버튼을 누르시면 새롭게 업데이트 되는 글을 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와 나탈리 콜이 부르는 Christmas Song을 올립니다. 행복한 성탄 맞이하세요
'Art Holic > 영화에 홀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은 우리 곁에 있다-영화 '어웨이 위고' (0) | 2010.02.28 |
---|---|
맹인안내견, 인간의 길을 안내하다-영화 '퀼' 리뷰 (0) | 2010.02.08 |
일본판 루저의 인생역전기-영화 '백만엔걸 스즈코' (0) | 2009.12.07 |
친구가 된다는 것은-영화 솔로이스트 리뷰 (0) | 2009.12.07 |
침묵의 힘은 세다-영화 '위대한 침묵' 리뷰 (0) | 2009.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