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선생님이 그리울 때 보는 영화-굿바이 칠드런

패션 큐레이터 2008. 12. 29. 01:46

 

 

    Au Revoir

Les Enfants

 

S#1-선생님, 나의 선생님

 

오랜만에 루이 말 감독의 영화를 봤다. 대학시절 문화학교 서울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그때, 난 유럽영화에 빠져 있었다. 루이 말의 영화 또한 주요한 필모그라피 중의 하나다.

 

영화 <굿바이 칠드런>은 그의 후기작에 속한다. 1987년작이었고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세계 대전만큼, 인간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 있을까? 루이말의 굿바이 칠드런은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를 녹여낸 작품이다. 그의 나이  11세, 프랑스는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있었고, 비시정부의 수반 마샬 페텡은 독일의 군사력 앞에서 철저하게 야합한 치졸하고 비열한 군인이자, 국가 통치자였다.

 

패텡은 전후 드골 정권이 들어선 후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앞에서 말했듯 영화는 감독의 어린시절을 관통하는 트라우마,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상처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당시 퐁텐블로 지역 근처의 로마 카톨릭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에 재학중이었고, 이 학교의 교장은 쟝 신부였다.

 

그는 실제로 학교장으로써 독일군의 강제캠프에 끌려갈 운명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유태인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후에 그는 반 나치 혐의로 아이들과 함께 끌려간다. 아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즉사했고, 신부는 퇴거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인이 수용소를 나갈때까지 식음을 전폐하며 투쟁하다 결핵과 피로누적으로 사망한다.

 

그는 전후 국가 근조훈장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대략적인 시대적 배경이다. 전쟁이란 참혹하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타인을 짓밟고 속이고, 사취하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면모를, 감독은 참 자연스럽게 영화속에 그려냈다.

 

이 영화는 줄리앙과 장, 두 아이의 시선 속에 그려진 괴뢰정부, 비시 하의 프랑스를 그린다. 마마보이 줄리앙과 유태인임을 속인 채 입학한 장, 침대를 함께 쓰며 친해지고, 천일야화의 야한 부분만 골라서 읽기도 하며 아이들은 성장한다. 어느날 줄리앙은 모두가 잠든 사이 친구 장이 키파(유태인의 전통적인 모자)를 쓰고 히브리 말로 기도를 하는 걸 듣는다. 이후 우연히 그의 로커를 열어 그가 유태인임을 알게 된다. 둘은 '깃발 빼앗기' 놀이에 참가했다가 우연하게 길을 잃고 헤매다 게슈타포에게 잡혀 수도원에 들어온다. 이후 둘의 유대관계는 더욱 두터워져, 공습이 시작될 때도, 몰래 음악실에 들어가 재즈풍의 곡을 연주하며 즐거워 한다.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이 씬이 마지막이다.

 

 

절대적 악이 판치는 제국의 꿈, 전쟁광 히틀러와 수족 괴뵐스가 독일 민중의 기억을 날조하고, 선동했던 시절이다. 괴뵐스는 특히 언론장악에 능통했던 정치가였다. (그가 쓰고자 했던 소설이나 계속 쓰게 했더라면 역사의 추락을 막을수 있지 않았을까)괴뵐스는 언론은 '정권을 위한 피아노'다란 말을 했다.  한 마디로 정권의 수장의 기분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을 연주하는 기계와 같이 되는 것. 하긴 지금 이명박 정권의 언론통제와 재벌방송 허용을 위해, 언론 노조를 짓밟으려는 모습과 어찌나 오버랩 되던지. 마음 아팠다. 어느 시대나 나치는 존재한다.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위해, 도적적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절대적 악과 손을 잡는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영화를 보면, 줄리앙이 가족과 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는 장면이 있다. 근사한 레스토랑이지만, 전시라 토끼고기만 배급이 되고, 이를 주문하는데, 당시 프랑스 민병대가 들어와 유대인에게 '즉각 나가줄 것'을 명령한다. 민병대란 말 그대로 독일 정부의 똥꾸멍을 핥던 비시정부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소탕하기 위해 만든 준 군사조직이다. 자유와 박애의 가치를 통해 세워진 프랑스의 정신은, 페탱이라는 늙은 쭈그렁탱이 군사 지도자에 의해, 독일에 협력하고 부역했다. 같은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의 개가 되어 같은 민족을 말살하고 짓밟는 자들. 미안하게도 과거 세계대전시의 이야기만은 아닐 듯 하다.

 

이 땅의 역사는 철저하게 친미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의 관점과 시선, 주장, 역사와 경제적 부, 이 모든 것들이 미국적 가치의 렌즈를 통해서 규정될 때, 그 정당성을 얻는 역사, 이 극심한 타자화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슬픔을 담고 있다. 미국적 가치가 몰락하고, 전 세계적인 연대와 합력이 필요한 세대에도, 여전히 미국적 가치의 추종만이 정통적 견해라 주장하고, 이에 반대 할 경우 반미와 좌파를 운운하는 친일세력은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고 합리화 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대는 존재들이다.

 

 

물론 프랑스는 전후 부역한 자들을 철저하게 처단한다. 이런 부분이 참 아쉽다. 우리의 친일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것이, 패악을 일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보면서 배운다. 역사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고 정리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김구가 테러리스트고, 일제의 노력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위안부 할머니는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 떠들고 있는 인간이 여전히 이 사회에 있다는 건, 유감이다. 죄의 댓가를 치루지 않고 뻔뻔스레 살아가는 인간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이 땅의 정권이, 철저하게 유린한 윤리공동체의 꿈과 더럽혀진 사회계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암울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게슈타포가 수도원 학교에 들어와 아이들을 벽에 세운채, 유태인을 색출한다. 패전의 기미가 짙어진 독일은 악날하게 유태인 학살을 자행한다. 물론 프랑스의 가치를 비웃으며 말이다. '너네 프랑스는 규율이 없다' 유태인 아이들 세명과 함께 끌려가는 쟝 신부. 아이들을 향해 "Au revoir, les enfants! Á bientôt!" 안녕 아이들, 다시 보자고 인사한다. 물론 마지막 인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인물이 쟝 신부다. 그는 레지스탕스이고, 독일로 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며, 유태인 보호를 위해 목숨도 건다. 폭력과 두려움의 시대, 그는 수도사로서 청중들에게, '힘든 시대일수록 배려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설교한다. 이런 설교, 말이 쉽지 만만치 않다. 그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다. 교육부의 일제고사에 맞서 학부모와 아이들의 견해를 수용해 현장학습을 간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퇴출시킨, 이 땅의 교육부에게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한다. 스승의 길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의 변명에 빠진, 교육집단은, 이 영화를 보면서 반성할 일이다.

 

다시 한번 사도의 길이, 스승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버거운 것인지, 그러나 그런 스승 아래서, 위대한 아이들이 자라난다는 간단한 교훈을 배우기 바란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퐁텐블로는 포도밭이 많다. 와인도 달콤하다. 주렁주렁맺힌 영롱한 포도알처럼 아이들이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순정품의 물과 햇살과 바람, 그리고 가지를 치고, 벌레를 쫒는 과수원지기가 있어야 한다.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한 알의 포도를 맺기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