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나의 행복한 슬로우 라이프
어제 흐린 물빛 가득한 하천을 따라 산책을 했다. 왠 청승이냐고 몰아붙일 분이 있을 지 모르겠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을 제외하곤 여전히 더운 지금, 이슬비 내리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마음 한구석이 잔잔해진다. 이디오피아산 요가체프 커피의 향이 떠오르고, 브라운 빛깔이 스며든 갓 구워낸 토스트가 생각난다.
도시적인 삶은 우리에게 속도와 시간과의 경쟁을 부추긴다. 회사를 다니고 글을 쓰고, 방송원고를 정리하고, 강의 준비를 하고,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쓰고, 전시를 다닐때도 언제부터인가, 한번에 원스탑으로 정리할 수 있는 최적의 스케줄을 짜내려고 고민하는 나 자신을 본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은 바로 이런 속도경쟁에 밀려버린, 아니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기를 꿈꾸는 이를 위한 영화다. 회사에 들어간 지 두해 째 되던 해, 상품기획과 트랜드 분석에 지쳐 있던 내게, 무엇보다도 할인점의 특성 상, 경쟁점포와의 싸움이 치열하던 그 때 나를 사로잡은 책이 한 권 있다. 여러분도 잘 알것이다. 꽤 오래된 책이지만,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란 책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쌍소의 책에서 읽었던 소중한 문구들을 떠올렸다.
"내가 삶을 행운의 기회로 여기는 까닭은 매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나 불만스러운 표정의 시작을 금장 알아차리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남쪽 어느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사이트를 봐도, 촬영장소를 알수 없어 알려드리기 어렵다.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은 여자, 타에코는 이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에 자리를 꾸민다. 맘씨 좋은 아저씨 유지, 불테안경을 쓴 채, 도무지 말이 없는
팥빙수 아줌마, 사쿠라, 도대체가 손님인지 가족인지 구분이 안가게
꼭 아침을 같이 먹는 고등학교 생물 선생인 하루나. 이들은 아침마다 독특한 형태의
체조를 하고 느릿느릿, 시간의 팥앙금을 발효시키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슬로우 푸드와 로하스가 새로운 테마로 떠오르는 요즘
느리게 만든 음식이 건강에 더 좋다는 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꽤 여러번의 식사 장면이 나온다. 볼 때마다 군침이 돈다.
먹는 습관에도 느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일게다. 인스턴트와 패스트 푸드는
결국 시간경쟁에 뒤쳐지기 싫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적응 기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천천히 먹고, 천천히 사색하고, 생각에 문득 빠지고
조건을 묻지 않으며, 정체가 뭐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느리게 흘러가는 것들을
음미하며, 달콤하게 맛보라며 권한다.
그리 특별한 줄거리가 없어서 사실 소개하기가 좋지 싶다.
<카모메 식당>이란 영화를 통해 한국에 알려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은
전편에 이어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는 메세지를 전하는 두번째 영화다.
삐에르 쌍소의 책을 읽다가 몇개의 주장에 밑줄을 그었다. 소개한다.
느리게 사는 지혜의 방법에 대해 다루었다.
- 빈둥거릴 것-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것
- 들을 것-신뢰할 만한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 권태-무의미할 때까지 반복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취미를 가질 것
- 꿈을 꿀 것-자기 안에 희미하나마 기민하고 예민한 하나의 의식을 자리잡아 둘 것
- 기다릴 것-가장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둘 것
- 마음의 고향-존재의 퇴색한 부분을 간직할 것
- 쓸것-마음 속의 진실을 형상화 할 것
- 술-그것은 지혜의 학교다 마실 것.
- 모데라토 칸타빌레-잘제보다는 절도를 가길 것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이 혹시 쌍소의 방법론을
영화적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의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팥빙수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쿠라 할머니
'조급해하지 않으며,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달콤한 빙수가 만들어진다"는 말. 음식도 결국은 기다림과 연결되나보다
하긴 오늘 드라마 식객에도 <기다림의 행복>을 테마로 하는 요리가 나오겠지......기대된다.
기다림은 단순하고 지루한 행위가 아니다. 큰 가능성을 향해
내 영혼의 문을 여는 일이다.
사쿠라 할머니가 만드는 팥빙수의 비결이 뭘까?
무엇보다도 팥을 조리하기 위해 기다리는 그 모습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 얼음 보숭이를 손으로 일일이 갈아, 그 위에 메이플 시럽을 담아내는 것이
화려한 고명을 엊은 팥빙수보다, 더 달콤하고 여유로와 보인다.
영화를 보다보면 참 음미할 만한 대사가 많이 나온다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달빛은 어느 길이나 쏟아진다"
"플라나리야는 꼬리를 잘라내도 금방 재생이 되, 영원한 생명이니까"
이 영화는 "내려 놓기"를 권한다. 내려놓은 만큼, 가볍게
다시 한번 삶을 되돌아보고 천천히 산책하기를 권하는 영화, <안경>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안경이 벗겨지는 것은, 바쁜 삶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마음의 틀이 벗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도시의 신랄한 속도, 그 속의 경쟁에 지친 당신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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