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를 찾아서-그녀를 생각한다
프랑스 출장을 갈때마다 습관적으로 루브르에 갑니다. 루브르를 갈때마다 조금씩 관점들이 변해가거나 혹은 좋아하는 대상이 바뀌어갑니다. 유명작가들을 골라서 보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예전에 잘 알지 못했던 작가들을
복원시켜 가며 보거나, 혹은 네덜란드 그림들을 통해 '인간의 허영'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를 배웁니다.
짧았던 천재들의 시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국 예술은 부유하는 믿음과 불확실성의 시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한의 덧붙이기를 계속해온 '고딕'의 역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이 기준을 통해 당대의 문화를 다시 되집어 갈수 있다는 고전적인 믿음에 그냥 봉착합니다.
아니 아직까지 그냥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에 갔을때 아주 특이해 보이는 조상을 보았습니다.바로 마크 빈이란 조각가가 헌납한 앨리슨 래퍼란 예술가의 조각상이었습니다.
사실 이분에 대해서 그 당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유명한 구족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지요. 오늘은 바로 그녀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가득한 그녀의 생과 그 이력들을 되돌아 보는 일은 살아있음에 대한 생의 환희를 가득 메우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삶과 모습은 루브르에서 지켜보는 비너스의 살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1965년, 양팔이 없고 다리가 짧은, 해표지증(phocomelia)이라는 기형으로 그녀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정부의 장애인 시설에서 성장하였으나, 17세부터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28세에 브라이튼 대학에서 1등급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1999년, 미혼모로 임신을 하게 된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조각가 마크 퀸의 모델이 되어 <임신한 앨리슨 래퍼>라는 작품을 탄생시키게 되지요.
높이 5미터의 이 작품은 2005년 가을, 트라팔가 광장에 전시되었고.
그녀는 또한 '2005년 세계 여성 성취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지요,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국민훈장(MBE)도 받았고 현재 6살된 아들 패리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방문을 해서 장애인들을 위한 세미나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앨리슨은 사진과 디지탈 이미지, 설치와 회화를 이용하여
그녀의 주요한 주제인 그녀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시선의 방식을 포착해 냅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주로 신체적인 정상성과 '미'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이에 자신의 모습을 통해 대답합니다.
두팔이 없이 태어났기에 그녀를 기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마치 고전적 조형의
정상이라 생각하는 밀로의 비너스를 만들어 냅니다. 비너스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로마 시대 최고의 미의 상징처럼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광장위에 놓여진 앨리슨 래퍼의 조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모성과 장애의 편견, 그것을 극복하고 감내해온
예술가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뜰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은 항상 기존의 시선에 도전하는 가열차고 뜨거운 모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와 가족으로부터
의 외면, 난독증으로 인한 학습부진 그리고 미혼모로서의 출산,
이러한 모든 것들을 그녀는 극복합니다. 그녀의 생은 우리 시대의 장애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
이 결코 정당하지 않음을, 의미있는 타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그 속에서 용기를
얻고, 우리또한 그들의 삶을 통해 배울것이 가득함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혼 직후 1999년 임신한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아이가 나올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합니다. 입으로 수저를 들어 이유식을 먹이고
아이를 온몸으로 안아 키운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장애란 결국 마음속에 있는것
이란 고전적인 믿음에 도달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와 배려를 충분히 해준 영국 정부와 사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이분의 작품을 보면서, 이분이 쓴 자서전을 읽으면서
장애란 결국, 우리 마음과의 싸움이다라는 식의 결론에는 이르고 싶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사회를 떠들썩 하게 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안마직업'이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앞서, 한가지 묻고 싶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특히 한국사회를 사로잡은 화두 '평등권' 저는 이 단어의 의미가 정녕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저 법관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국민들의 복지는 커녕
종로판에 세워진 그 잘나빠진 복원된 하천들, 비가 오면 오염물질을 방사해
물고기가 죽어가는 그 하천을 둘러싼 좁은 포장도로, 장애들인들은, 휠체어를 타고는
결코 다닐수 없는 그 좁은 길을 만들고 정치적인 성공이라고 거들먹 거리는
대권 후보라 칭하는 정치가의 그릇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기형이나 장애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있는 시각장애인들의 유일한
직업권까지 아무런 제도적 장치없이, 사회적인 안전망 구축은 커녕 그 어떠한 대안도 없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법원의 판결을 보면서, 그들이 말하는 평등의 대안이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장애인의 날만 되면, 장애우가 어떻고 타자가 어떻고 떠들어 대고
마이크 갖다 대면 '장애인들이 편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떠들면서
정작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 하면 땅값이 떨어지고 아이들의
교육에 안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반대하면서 땅에 드러눕는 개거품 문 강남의 아줌마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당신들이 말하는 그 악영향이란 도대체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입으로는 장애우의 안전망과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중의 위선을 쓴 당신들의
그 구역질 나는 얼굴이 아이를 업어 키우지 못해 입과 가슴으로만 안을수 있는 작가의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된다고.....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아직도....넘어야할 우리 앞의 산들은 너무나도 높고 그 실루엣은 우리를
암울하게 합니다. 집값이 떨어져서 장애인 시설에 대한 동의가 어렵다면 그리하십시요.
그렇게 사십시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아이들의 교육, 특목고와 조기유학, 방학동안
아이들에게 별 쓸모없는 토플가르치느라 월 백만원에 독서토론 과외에 월 20만원
원어민 회화 월 12만원, 논리력 향상 과외 12만원 수리력 향상 과외 12만원
악기 하나쯤은에 월 30만원,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요, 맥클라렌 제품 60만원
최고의 영국산, 미제는 약해서 못쓴다는 멋진 아줌마들
그럼요....준비해야지요.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대학이 어렵잖아요ㅠ.ㅠ
어머머머, 선생님 우리애가요......로 시작해서 하루를 끝내는 아주머니들
소아마비에 걸려 학교에 통학하는 아이에게 반을 옮겨달라고 하는 아줌마들
아이들의 교육에 해를 끼친다고 말하는 그 아줌마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요....그렇게 살아가세요. 당신들은 이제 더이상 비너스가 아닙니다.
당신들의 종교, 그 '아이'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맘 껏 펼치십시요
난 당신들이 늙어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자고 하면 '내 아이의 교육에
늙은 이들의 모습이 교육상 좋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거품을 물거니까요
자업자득의 현명함을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칠꺼니까요
그럼요....우리아이는 소중하니까요
우리 시대의 모성을 다시 생각하고 싶습니다. 앨리슨 래퍼의 작품을 볼때마다
우리들 내면 속에 가득하게 침윤된 그릇된 모성의 방식과 양육을
또한 생각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