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에서 보낸 한철-아테네움 미술관, 핀랜드 미술의 보고
헬싱키의 거리를 걷는 시간, 차가운 냉감각이 볼에 닿는 느낌이 좋더라구요
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리서치겸 온 여행이지만 잘 먹고 잘 쉬고 돌아가자고 다짐하며
핀란드의 마리메꼬를 비롯 다양한 디자인 브랜드들을 돌아봤습니다. 중요한 건 상품의 개별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상품들이 진열된 매장의 분위기와 점포 내 머천다이징 관련 내용들도 함께
봐야 합니다. 패션 컨설팅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항상 바이어 시절 배운 것들이 몸에 여전히
남아서 어디를 가든 균형을 잡고 다양한 시각의 렌즈 속에 정보들을 집어넣습니다.
상품들을 실컷 보고나면 다시 그림을 비롯한 조형작품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핀란드 미술의 보고인 아테네움 미술관입니다. 1863년
공식적으로 문호를 열었던 이 미술관의 이름은 팔라스 아테네, 바로 그리스 신화 속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 아테네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놀라왔던 것은
제가 아는 미술작품들 상당수가 서유럽 중심의 작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죠. 북유럽의 작가들은 여전히 생소했습니다.
헬레네 슈에르프벡
<회복기> 1888년 캔버스에 유채
이 그림은 아테네움 박물관이 소장한 그림 중 명작 중 하나입니다.
여류화가 헬레네 슈에르프백은 사실주의 화풍으로 멋진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림 속 아픈 아이가 좀 열이 내렸는지, 혹은 회복기인지 아픈 마음들이 빨리 낳게 해달라고
작은 화병에 꽃가지를 걸어놓고 바라보는 모습이 사뭇 마음을 따스하게 만듭니다.
원래 병과 회복은 자연주의 회화의 주요 테마이기도 했지요. 어찌되었든
이 그림은 1888년 파리 살롱에 공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앨버트 에델퍼트
<여왕 비앙카> 1877년 캔버스에 유채
이 그림은 여왕 비앙카란 그림이에요. 스웨덴의 에릭슨 왕과 정략 결혼한
역사 속 인물이지요. 핀란드는 스웨덴의 오랜동안 지배를 받았고, 그들로 부터 민족적
정체성을 실제로 찾고 만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림 속 아이를 껴안고 있는
엄마의 시간, 바로 모성적인 순간들이 너무 아름답게 잘 그려져 있지요.
예로 야르네펠트
<가지들을 태우며> 1893년 캔버스에 유채
눈온 산 위에서 여전히 나무를 하고 태워 장작을 만드는 아이들의
표정이 다소 무겁습니다. 눈에 숯검댕을 묻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서럽게 보는 모습에 마음 한 켠이 무겁습니다.
휴고 짐베르크
<상처받은 천사> 1903년 캔버스에 유채
드디어 보고 싶었던 그림, 핀란드의 국보급 그림앞에 섰습니다
예전에도 이 그림으로 글을 한 번 쓴 적 있었지요. 뾰투룽한 두명의 아이
들것에 실려가는 천사의 모습이 매우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림 속 배경은 오늘날
헬싱키의 동물원이 있는 공원이라고 하네요. 그림 속 천사는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습니다. 어느 시대나 볕이 있어도 등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 어둑시근한 어둠의 자리는 있는
법입니다. 종교 지도자란 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합당한 도덕성을 상실해가는 요즘, 그림 속
천사는 바로 교회와 점점 멀어지는 자발적인 우리들이 아닐까요. 치유가 필요합니다.
한 나라에 갈 때마다 저는 철저하게 뮤지엄을 들러 며칠이고 보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저 한 장의 그림이, 단순한 시각적 자료가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북유럽 여행도 가시는
분들이 많아서 블로그를 검색해보면 꽤나 많은 여행기가 올라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과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만 정교한 해석이나 나름의 시선이 돋보이는 글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한편의 블로그에 다 담기도 어렵지요. 그만큼 회화라는 렌즈를 통해 내가 방문한
나라의 면모들을 읽어내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오해를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요. 그래도 북유럽에
와서 지금껏 알지 못한 작가들을 익히고 배울 수 있는 것.
여행만이 주는 작은 즐거움임에는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