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일상의 황홀

벚꽃 아래서-책 읽는 시간

패션 큐레이터 2013. 4. 19. 00:50


완연한 봄 기운에 온 몸과 마음이 가볍다. 봄은 온다. 꽃이 피는 

시간은 더디어도, 계절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살아있고, 무뎌지지 않는 한

봄은 온다. 봄은 특정한 계절의 한 순간 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4월이 되면 

전가의 보도처럼, 많은 글과 기사와, 일상의 똑똑한 척 해대는 이들의 입술 위에 오르는 

엘리어트의 시편, <황무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사람들은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만 즐겨쓸 뿐, 엘리어트의 

장편시를 제대로 읽은 이를 별로 찾아보지 못했다. 황무지의 제1장

'죽은 자의 매장'에 나오는 이 첫소절을 갖고 사람들은 너무 쉽게 단죄하듯

봄이란 계절을 싯구의 표현과 연결짓는다. 세계대전과 기술혁명으로 인한 인간의 

소외를 그렸다지만, 사실 답은 이미 이 시어 속에 다 있지 않은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영속적인 자연의 잔혹한 질서와 힘 말이다. 뿌리를 깨우는 봄비 말이다.

우리는 이걸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서로의 몸을 비벼 깨우는 저 

자연의 힘 속에서 미약한 인간도 다시 한번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아침 출근 길, 퇴근 길, 10시까지 하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빌려

읽고 글을 쓰고 한다. 내겐 쉼터 같은 곳



올해는 유독 봄이 더디게 오는 듯 했다. 그래서 마음까지 조렸다. 

그래서인지 환하게 피어, 만화방창의 세계를 이뤄준 저 꽃무더기가 더욱 반갑다



4월의 정거장도 이제 절반이 벌써 지났다. 늦은 봄이기에, 명멸의 시간이

그 리듬은 어떻게될지 알 수 없으나,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5월 말에 내 놓을 책을 

완성하고, 요즘은 독서를 많이 한다. 텍스트를 쓰는 자는, 타인의 텍스트를 엄준하게 소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그 과정의 힘겨움을 버텨준 어느 한 사람의

실존적인 삶에 대해 감사부터 한다. 글을 쓰면서, 그것으로 세상에 조금이나마 알려지며 내가

내 자신에게 부과한 일종의 정신적 습속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대중화되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사회라고 하지만, 정작 읽을 글은 점점 줄고, 사색대신 검색이

온 삶의 영역을 지배할 수록, 글의 질감과 쫄깃한 맛은 밋밋해져간다. 



나는 글만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이는 아니다. 텍스트 중심주의, 혹은 

문자 우월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제는 이미지로 소비하는 

삶 보다,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게 오히려 더 편한 옛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일 것이다. 도서관 앞에서 행사를 해서 사놓은 15만원 어치의 책을 오늘 부터 열심히

읽어보려고 한다. 다들 하나같이 만만한 내용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한줄 이라도 

머리를 끄덕여가며, 온 몸이 공감하며 내 입술이 텍스트를 따라갈 때, 나는 기쁘다.



하늘 아래 촘촘하게 서로의 몸을 엮으며 뭉개뭉개 피어나는 

벚꽃들, 명멸하기에 그 순간의 애처로움과 환희가 더더욱 소중하다.

나이들어가며, 봄꽃을 좋아하는 걸 보니, 내 안에 무엔지 말 못할 어느 봄날의

기억이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거나, 있었다고 가정하고 싶은 찬연한 날들이 있는 것인지

뭐 어떠랴, 한 겨울 한기 속에 배변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가 따스한 기운 입어

토해내는 저 꽃이, 그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을 감싸주고 있음을 믿고 있기에 말이다. 


참 좋다........살아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