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알렉산더 맥퀸-우리도 천재 디자이너를 육성할 수 있을까?

패션 큐레이터 2012. 3. 13. 01:51

 

 

알렉산더 맥퀸의 런웨이를 읽는 시간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Alexander McQueen)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번 책은 제가 번역을 하진 않았습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디자이너의 삶과 작품들을 심층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당히 긴 한 편의 해제를 썼습니다. 이를 위해 알렉산더 매퀸의 전 컬렉션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고 텍스트로 각 런웨이의 문화적인 배경과 레퍼런스를 찾아서 정리해 올렸습니다. 저자인 크리스틴 녹스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한 패션 파워블로거입니다. 최근 외국의 패션 서적의 유형이 블로거 책의 등장입니다. 내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부럽지요? 맨날 제품 후기/사용후기/화장법만 올라가는 다음의 패션 블로거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깨달았으면 합니다.


최근 크리스틴 녹스가 비교 복식사 책도 한 권을 내서, 이 책도 번역을 위해 외국 출판사와 타진 중입니다. 우선 선 출판을 한 곳이라 계약도 쉽게 따냈고요. 출판사도 깊은 관심을 보여서 비교 복식학 책도 번역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손대야 할 책이 많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의상학 교육이 반세기가 넘었지만, 제대로 된 단행본들이 나오지 않고 선대 학자의 눈치를 보며, 증보나 신규 책을 내지 않는 학자들 때문이죠. 다른 건 몰라도 출판 관련 해서는 이제 제 자신이 제안하는 것들을 다 해볼 수 있는 정도는 되어가는 것 같아서 행복합니다. 잘 팔리는 책은 아니지만 필요하고 어느 정도 시장성이 있으니 저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요.



맨날 스타일 위주의 아이템 소개나, 패션회사의 행사에 다녀와서 후기를 올리거나, 연예인들의 옷차림 소개 및 따라잡기 위주의 글만을 양산해온 한국의 대부분의 패션 블로거에 비하면 저로서는 크리스틴 녹스의 글쓰기 방향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깊이있는 패션의 담론을 양산하고 싶어도 우리 스스로 머리 아프다고 팽겨치고, 그런 가운데 패션이란 현상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대안을 내놓치 못한채, 브랜드 성장 위주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살아가기 때문이죠. 이번 책의 해제를 맡아 A4 16장의 긴 해제를 한 것도 이런 목적을 조금은 번역서를 통해 풀어보고자 했던 저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 책 내용에 비교해보면 해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 저자의 텍스트양에 맞먹지요. 우선 긴 해제와 설명을 쓸 수 있게 허락해준 크리스틴 녹스에게 그저 고맙기만 합니다. 트위터로 절친인 그녀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번역된 걸 알고 기뻐하네요.



이 책은 맥퀸의 초기작과 컬렉션에 대한 정보가 다소 부족합니다. 이 책의 단점이기도 했죠. 알렉산더 맥퀸을 잘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초기 컬렉션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성격과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해제를 쓰면서 주력을 둔 것이 이 부분이에요. 패션책 서술의 일반적인 방식처럼, 연대기적인 정리이기에, 전체를 관통하고 핵심적인 미학적 요소들을 추출해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맥퀸의 전 컬렉션에 나타나는 주요 모티브와 테크닉, 문화적 레퍼런스를 꼼꼼하게 찾아서 정리했습니다. 작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알렉산더 맥퀸전을 보고, 기억을 떠올리며 자세하고 정교하게 한 인간의 작품 속에 내재된 역사와 문화의 요소를 찾았습니다. 무엇보다 맥퀸의 작품 속에 주로 드러나는 동양자수의 흔적과 이국적인 패션의 매력이 누구의 영향인지를 밝히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디자이너 담론이 본격화 되었으면 합니다. 산업디자인이나 다른 분과에 비해, 유독 한국은 패션 디자이너들에 대한 담론과 서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제가 이상봉 선생님을 소재로 패션평론과 창작 프로세스에 관한 책을 쓰는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지요. 부족하겠지만 할 수 있는 한, 포기하지 않고 쭉 이런 삶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누군가의 피땀 위에서 후대는 좀더 편하게 공부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봐야죠. 그래도 요즘은 조금씩 달라지는 조짐이 보입니다. 패션과 융합해서 설명할 수 있는 통섭적 관점을 가지고 글을 의뢰하는 전문 저널이나 언론매체들도 늘었고요. 그래서 글쓰는 양이 더욱 늘었습니다.


패션과 건축을 주제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곧 경제지에 발표할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무용론이 판치는 세대입니다. 외국 브랜드 앞에서 죽어가고, 우리 손으로 빚는 것들이 점차 힘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공예와 디자인 정신이 사라진 상품, 아무리 국력이 높아져서 여기에 아우라가 생기고 스토리텔링이 부여되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손의 힘을 믿고 키워야지요. 그런 점에서 수제 수트의 본산지 세빌로에서 옷의 기초를 익혔던 맥퀸의 과거가 더욱 부럽더군요. 우리에게도 이런 디자이너가 꼭 한번 태어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요. 중요한 건 디자이너를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플랜을 짜는 것이고 교육의 근본적인 체계와 방식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과 패션교육의 결합을 오랜동안 부르짖어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시스템에선 상당히 암울하다는 느낌 밖엔 토해내지 못해 아쉽더군요. 복식사를 비롯한 창의적인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키워내는데 대폭 수정이 필요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교수들의 글과 논문들을 읽으면서 참 답답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패션산업, 패션관련 대학교육이 바뀌려면 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문광부나 지경부같이 패션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부기관에서, 쓸모없이 학계인사들을 불러다, 별 소용없는 보고서나 받고 혈세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저는 참 신기합니다. 왜 이렇게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대학교수들을 좋아할까요? 실무능력도 전무하고 미래적인 관점도 대안도 잘 내놓지 못하는 그들을, 그저 아카데미란 명함을 보고 기용하는 지금의 문화는 바뀌어야 합니다. 저항도 많겠지만 저는 싸우는 쪽을 택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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