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위한 한 권의 책-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패션 큐레이터 2011. 12. 30. 16:22

 

민주화의 엠블렘, 고 김근태 의원을 기리며

 

민주화의 큰 별, 김근태 의원이 별세했다. 향년 64세. 고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전사는 이제 또 다른 별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김근태 의원의 사망과 함께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가 있으니 바로 고문경찰 이근안과 그에게 지시를 내린 국민건강보험공사 사장 정형근이다. 80년대, 정치적 부당성과 독재의 그늘 아래, 때 아닌 '우리들의 석기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이들이 하나씩 우리 곁에서 사라져갈 때도 고문경찰과 그에게 지시를 내렸던 인간은 너무나 '편안하게' 살아간다.

 

고문경찰 이근안이 세상에 알려진 건 김근태 의원의 책을 통해서다. 남영동 수사실, 민주화 운동에 몸담은 대학생과 재야 인사들은 이근안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관절뽑기 등 각종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는 지금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로 활동 중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솔직히 그의 전향이 마뜩찮고, 자칭 그가 회개했다는 과거의 흔적이 여전히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사회적 화해를 하지 않은 그가 역겹다. 이근안은 김근태 의원에게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물고문을 가했다. 이를 통해 얻게된 파킨슨씨병, 바로 고문의 후유증이다.

 

아이히만과 이근안, 그 공통점과 차이점

 

이근안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고문기술자라 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오히려 심문 기술자'라고 말하는가 하면 '당시엔 고문이 애국이었다'라는 말로 논란의 불씨를 키웠다. 더 나아가 '고문도 예술이 된다'며 자신의 과거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도 서슴치 않았다. 사회적 공분의 양상을 보고도,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된다면 이때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가 있다. 평생을 전체주의의 본질을 연구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홀로코스트의 최종 책임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을 전전하다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돼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그의 재판을 참관한다. 아렌트는 그를 가리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악의 평범함에 놀라며 끄집어낸 그녀의 결론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이란 점이다. 아이히만은 너무나도 평범한 관료주의 사회의 일꾼이었을 뿐, 그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그 내용여부에 상관없이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믿었던 것 뿐이다. 그것이 공복의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고문이 당시로서는 애국이었다"라고 떠들어대는 이근안의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동을 세 가지의 무능성에서 발원한 것으로 설명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으로 구분하고, 이로부터 '악의 평범성'이 생겨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핵심은 사유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의무란 점을 밝힌 것이다. 생각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의무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에게는 없고 이근안에게는 있는 것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아이히만은 결국 교수형을 당했지만 이근안의 경우 단지 7년간의 죄값을 치뤘다는 그의 '회심기'만 떠돌며 이근안은 '목사'라는 타이틀 아래 건재한다는 점이다.교회의 갑옷을 입고 회개란 단어를 남발해온 그가 우리에게 내뱉은 변증은 '고문도 예술이 된다'라는 허무맹랑한 논리였을 뿐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근안은 분명 죄인이며 그에게 회심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사회적 범죄에 대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 범죄로 환원하려는 욕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근안은 바로 이런 교회의 울타리를 이용할 줄 아는 머리는(?) 쓸 줄 아는 자이다.

 

성경은 죄를 저지른 자에게 '자신이 상처를 입힌 자들과 적극적으로 화해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적극적'이란 죄를 지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수단을 다해 속죄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응답' 받으면 그것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사회를 향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과는 커녕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외부효과에 대해서도 둔감하다. 목사라고 이런 말을 할줄 몰라서 안할까?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설교'란 상품을 통해 교회성장이란 지상 목표를 이루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 결코 사회를 향한 범죄자를 치리하기 보단, 싸구려 은혜의 가면을 쓴 면죄부를 주기에 바쁠 수 밖에 없다. 이근안의 목사서품은 개신교가 부여한 쓰레기 면죄부다. 그에게 정녕코 성경을 다시 읽으라고 하고 싶다. 성경적 회심, 바로 메타노이아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보라고 말하고 싶다.

 

영어에서는 사회/정치적 국면의 180도 전환을 뜻하는 표현으로 Road to the Damascus란 관용어구를 종종 쓴다. 타임지를 읽다보면 발견하는데 그 뜻은 성경에서 나왔다. '다메섹 도상에서'란 뜻이다. 그 길 위에서 벌어진 사도 바울의 회심에서 따온 표현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자들을 감옥에 넣는 걸 기뻐하던 바울을 전도자로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 다메섹이다. 회심이란 죄에서 돌아섬이다. 돌아설 때 머뭇거리는 건 회심이 아니다. '고문도 예술이다' '고문이 애국'이라 말한다면 난 당신의 회심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조문도 가지 않고, 전화도 피하며 교정전도라는 미명하에 '좌익척결'을 운운하는 당신, 언젠가 백범 살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를 교회에서 만나기를 기도해야지. 나의 하나님과 당신의 하나님이 기도로 쟁투하게 되는 걸거다. 꼭 소망하여, 실체의 꿈이 될 때까지 강청하리라.

 

노란코끼리의 <너라는 바람에 베인 상처> 라는 곡을 대문에 걸었습니다. 민주화의 노정을 위해 쑥 물든 폭우 온 몸으로 맞고 하늘로 가신 김근태 의원님 가시는 길 그저 행복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흘린 피로, 더 이상 우리들이 저 부당한 바람에 베이지 않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