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죽음에도 교육이 필요하다-연극 <죽이는 수녀들 이야기>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1. 12. 28. 02:33

 

 

 

호스피스들의 이야기

 

오늘은 출판인들의 매거진 <기획회의>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저술도 아닌 번역서로 인터뷰를 다 해보네요. 내년에 나올 패션 인문학과 복식심리학, 리서치 방법론을 다룬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미술사가 노성두 선생님이 우연하게 합석하셔서 식사도 했습니다. 정말 많은 미술책을 쓴 분이죠. 존경하는 저자 이시죠. 한국의 많은 대중 미술 저자들 중, 서양고전문헌학을 정통으로 공부한 분은 노성두 선생님이 유일합니다. 이 분 따라 갑자기 혜화동에가서 연극을 한편 봤습니다. 계속 이 작품을 봐야 한다며 거의 반강제로 끌고 가셨습니다. <죽이는 수녀들 이야기>란 연극이었...네요. 사실 처음에는 연말에 왠 갑자기 교회연극같은 분위기의 작품을 보나 했었지요. 내용은 호스피스를 담당하는 수녀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마지막 자리에 당신을 초대하며

 

말기암 환자들, 죽음을 거의 한달 정도 남긴 이들이 사연을 연극으로 한 것인데, 처음엔 무슨 신파조의 교회연극인가 싶어서 약간은 심드렁했습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실화의 힘때문에 마음 한켠이 촉촉하게 젖어가더군요. 이 연극의 실제 배경은 1877년 영국의 메리 포터라 설립한 천주교 수도회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갈보리 언덕까지 함께 한 어머니와 마리아의 정신을 이어받아 '죽음에 직면한 이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영면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삶의 일부'라는 말씀을 남겼듯, 이 호스피스 조직은 죽음의 직전까지 온 환우들에게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정서적, 사회적, 치유적 돌봄을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미국의 경우,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 중 40퍼센트 이상이 호스피스 간호를 통해 인생을 마감한다고 하지요. 여기에 반해 한국은 1퍼센트 겨우 넘는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극에서는 다양한 사연들이 소개됩니다. 압구정 주변의 모든 건물을 갖고 있던 자린고비 할아버지, 하지만 예전 성공을 위해 고향을 빠져나오며 주인집에 불을 지르고 나왔던 범죄에 대해 용서를 비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젊어서 위암선고를 받고 남편에게 애써 쿨한 척 이혼을 요구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이를 두번이나 버려야 했던 할머니가 있고, 그림만 좋아하다가 죽어가는 청년이 있는 가 하면 자신의 병후를 감춘채 생의 마지막까지 환우들을 돌보는 수녀님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드라마에서 극적반전을 찾는다거나, 스토리 구조를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요. 실제 이야기를 다룬 것이고 지금 이 땅에서 이뤄지는 호스피스의 역할을 그린 것이니, 오히려 삶의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다큐멘터리란 말도 결국 '가르친다'는 뜻의 라틴어 Docere에서 온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극을 통해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작은 시도라고 받아들이면 좋을 듯 합니다.

 

죽음 교육이 필요한 이유

 

잘 사는 법에 대한 강의는 넘쳐나도 잘 죽는 법,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교육은 없는 나라. 서점에 가도 온통 인생의 성공비결을 떠들어대는 자기개발서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죠. 생의 마무리 과정이 남겨진 타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생각이랄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우리입니다. 타인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것이 나의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심성,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시간 속 생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일부로서, 현생과 다가올 생의 중간 지점에 놓여져 있으며, 아름다운 마무리는 아름다운 출발이란 영적 의미를 띠기 때문이죠. 환우들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죽음이란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관문을 품위있게 통과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때이죠. 한국처럼 호스피스 문화가 일천한 나라에서 인식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연극을 택한 점도 종교의 차원을 넘어 놀라왔습니다.

 

죽음은 현세에서 그 개념을 직시할 수록, 더욱 현재를 뜨겁게 달구는 힘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전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읽으며 발견했던 문장이 오늘 따라 머리 속을 떠다니는 군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동물이다. 하지만 죽는다는 사실이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동물이기도 하지' 라고 말이에요. 연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해야 하는 시점에서, 지금 이곳의 저를 바라보게 되네요.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한 시간이 찾아옵니다. 올해 너무 많은 일을 벌이느라, 생의 울림을 주는 일을 하는데는 소홀했습니다. 다시 한번 옷깃을 내리고 한기 서린 거리를 걸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