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20대와 40대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패션 큐레이터 2011. 5. 22. 22:00

 

 

5월도 벌써 끝자락에 접어들었습니다. 원고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시간을 내어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최근 <나는 가수다>란 MBC의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닥본사(닥치고 본방사수의 준말)'란 말을 내뱉는

광팬이 되었습니다. 저는 뒤돌아서서 생각합니다. 왜 이 땅에서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이 새롭게

사랑을 얻고 있는가?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를 통해 기존의 음악프로그램을 장악한

아이돌 가수들로 인해, 한켠으로 밀려 나 있던 80년대 가요문화의 다양성이

새로운 포멧의 옷을 입으면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가창을 중심으로 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영혼을 울리지 못하면 어떤 장르던

도태되고 맙니다. 댄스가수들은 언제부터인가, 립싱크를 하는 건

당연한 이치고, 그래도 자신들을 좋아하는 광적인 팬덤 문화에 사로잡혀

아티스트로서 최소한의 도덕적인 잘못 조차도 당당하게 면죄부를 받으면서 살아왔죠.

온통 10대 중심문화가 판을 치고, 다른 세대별 이해와 관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래봤자, 결국 음악시장 자체의 파이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죠.

 

 

저는 나가수를 통해 우리가 공연문화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길

바랍니다. 현재 라이브 공연문화가 정착되려면 가격 구조에 대한 성찰도 있어야

겠지만, 무엇보다 모든 걸 무료로 즐기는 걸 좋아하는 문화에서, 누가 힘들게 무대에 서서

혼을 바칠까요? 누군가 책에 대해 자세히 서평을 해주기는 바라면서 자신은 책을 사서 읽지 않는

세대. 책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추출된 PDF파일을 무슨 전리품을 획득한 양 자랑하는 세대. 이 세대가

진정코 아우라란 단어의 힘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현장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다층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문화가 되길 바라죠.

 

 

우리는 왜 좋은 공연을 보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은 쉽게 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모든게 쉽게 복제되는

시대에, 최신 영화가 나오자 마자, TS판이니 뭐니 하면서 영화 파일이

굴러다니고, 이걸 전리품처럼 즐겁게 받아서 보는 이들이 있는 한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아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있다면, 또 한편에선 복제된 이미지와 선율이

줄 수 없는 현장의 매력을 조금씩 배워가는 이들도 있는 것일테니까요. 아우라 상실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고색창연한 손맛과 가창의 힘과, 수공예적 미의 가치를

찾아다니는 도시의 헌터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번 나가수는 그 헌터들의

숫자를 적어도 콘서트 문화의 측면에서 증가시킬 좋은 호재인 셈이지요.

 

 

쓸모없이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이번에 본 국립발레단의

<컨버댄스>는 창작 발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뤄진 꽤 멋진 성과입니다.

저는 무용을 좋아합니다.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만들어내는 육체의 언어들을, 그 궤적을

따라가면서, 진부함과 일상의 습관에 젖어버린 죽은 내 자신의 육체를 떠올리고, 다시 긴장감을

담아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현옥의 안무로 시작된 <J씨의 사랑이야기>는 20대 30대 40대의 사랑을

그 사랑에 내재된 고민거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컨버댄스는 Convergence와 Dance의

결합을 뜻합니다. 기존 무용이 연극과 디지털 음악, 재즈 등과 결합되면서 지금껏

시도하지 못했던 메시지의 내용들을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J씨의 사랑이야기>는 떠남과 만남, 그 설렘을 응축하는 공간으로서의

공항을 배경으로 각 세대별 커플의 무용을 담습니다. 조금 불만이었던 것은 세대별 사랑의

특징을 담아내는 안무가의 시선이, 정작 사랑의 가장 큰 본질에 대해선 무지했다는 점입니다. 젊은

안무가답게 연극과  무용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합니다. 다만

각각의 사랑이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는 것. 각 세대별로 응축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너무

고정시켜놨다는 점입니다. 40대의 사랑을 원숙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돌아가선 박완서 선생님이 예전에 쓰신 글을 보니, 심사위원을 할때

인물의 묘사를 주로 보시는데 '40대의 원숙한 남자'란 표현을 보면서 "욘석은

남자를 모른다'고 하셨다네요. 겪어보지 않고 세대별로 이럴꺼야 라는 스테레오타입이

많습니다. 요즘 같아선 40대를 가리켜 원숙미 혹은 원숙적이란 표현은 조금 거리가 멉니다.

사랑과 화해, 그 지리한 싸움을 반복하는 20대의 사랑, 중간적인 사랑과 서로에 대한 무뎌짐을 말하는 30대

이런 식의 설정자체가 안무가 스스로 너무 어려서, 세대별로 고정시켜 놓은게 눈에 딱 보이거든요.

뭐 이건 제 생각이고, 사실상 무대화 작업은 어느 정도 캐릭터를 제한해서 고정을 시켜놔야

할 필요도 있으니 이 정도에서 약간의 섭섭함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무용과 연극이 결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

안무가는 연극을 보러가는 관객들을 무용에 끌어내고

싶었다고 하네요. 그 의지가 정확하게 읽히는 공연이었습니다.

이번 <컨버댄스>에는 발레리나 김주원을 주역으로 한 <01>이란 작품도

있었습니다. 끄고 켜고, 이원적인 힘들의 충돌과 흐름을 말하는 이 디지털적 부호

01의 숫자를 몸으로 개념화 하여 표현하는 무용수들의 몸이 관람객들의 입장에선 언제나

통어와 해석이 어려운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몸의 가능성을 언제나

확장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돋보이는 공연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의 폭을

넓게 만들죠. 라이브, 공연이란 장르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매력이자 아름다움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틀 속에 들어있나요?

40대지만 여전히 20대의 모습 30대의 모습이 다 들어있겠죠?

세대별로 규정할 수 있는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요? 누군가 페이스 북에

남겨놓은 이 작은 리뷰를 보고, 한 마디 썼더군요 70-80대가 되어도 사랑은 여전히

애잔하고 가슴 아프다고. 사랑은 세대별 단상을 넘어서는 강한 끌림의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나이를 보고, 그/그녀가 껴안거나 겪어온 사랑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겁니다....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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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화미디어 문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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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주말판 O2에 <복식사 오디세이>를 연재합니다. 패션의 고전을 미술을 통해 섭렵하는 멋진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원고량이 너무 많아 어차피 블로그 활동은 열심히 하기 어렵습니다. 책도 써야하고 방송활동도 시작해야 하니, 부담감도 크고요. 적절히 안배할 지혜를 구했으나, 때론 블로그를 비롯한 모든 온라인을 끊고 쉬고 방전된 자신을 지키는 일도 필요하겠죠. 기사와 방송으로 만나겠습니다. 공연 리뷰나 패션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래도 빼놓지 않고 올려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