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그리움에 쩔은 당신, 루체른으로 가라

패션 큐레이터 2010. 11. 30. 12:35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결론을 떠올립니다. 아트라베시아모, 아마도

기억이 맞다면 "함께 건너자"란 뜻이지요. 함께 건넌다는 것은 먼 여정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친구이자, 소중한 이들임을 천명하는 일입니다. 모든 여행은 아주 사소한 우연과 작은

결심에서 시작되지만, 세린디피티라 불리는 우연의 촘촘한 바구니를 여는 순간, 우리는 우리자신을 둘러싼

생경하고 익숙한 이중의 풍경과 만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 풍경 속에 외롭게 던져진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타자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그들과 손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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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큰 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뒤쳐져 있던 것들을 생의 중심부에

다시 가져다 놓는 일. 그렇게 균형과 목적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나에 대한

자존감과 소중함을 배우는 것.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루체른에 도착한 날도 그랬습니다.

3일이란 명멸하는 시간 동안 반 나절은 우기의 시간이었고

나머지는 유럽의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햇살의 시간이었지요.

그러고 보면 항상 여행운이 좋은 편입니다. 루체른은 그 거대함 부터 호수가 아닌

수평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바다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선착장에 나갑니다. 본격적인 유럽의

겨울은 신산한 바람과 선착장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구성된 도시의 단아한 실루엣을 느끼기엔 안성 맞춤

이지요. 이런 적요의 시간이 좋습니다. 호숫가엔 백조들이 떠다니고 키 낮은 도시의 풀들은

파르르 떱니다. 차가운 체감온도와 달리, 하늘은 유독 맑아 대비가 되는 곳.

 

 

올망졸망 선착장에 매어있는 배들이며, 표를 사서 학교를 가기 위해 기다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행 중 항상 푹 잠을 잤지만 매 시간 여독이 풀리지

않은 터라, 작은 미열이 가슴 속에서 고요하게 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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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깨어 맞는 견고한 겨울의 아침은

대기에 젖어드는 촉촉함과 신산함으로 인해 더욱 정신을

맑게 만들더군요. 새벽 날개치며 솟구쳐 오르는 새의 비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바다끝에 거해도 저 새의 일상 모두를 책임지는 거대한 조형자의 힘을 느끼고 싶은 자발적

귀향객의 마음을 저 새도 아는 것이겠지요.

 

 

아이들은 작은 빵부스러기로

새들을 유혹합니다. 매일 보는 풍경일테지만

그들에겐 이 시간이 좋은가 봅니다. 새들의 가녀리고 외로운

떨림은 오늘 항해의 첫 방점을 찍습니다. 다소 나른한 겨울의 어린 고요가

고아대는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지요. 보일 듯 말 듯 묻어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이들의 표정과 오버랩될 때쯤, 배는 이제 리기산을 향해 진수합니다.

 

 

청록과 블루가 알맞게 배합된 하늘의 빛깔이 곱습니다.

서둘러 갑판에 올라가 풍경을 담아봅니다.

 

 

 

 

피츠나우란 작은 소읍에 내려 본격적인 등정 준비를 하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등정용 트램을 타러 갑니다. 레드와 블루, 두 가지 대비된

강한 색상이 온통 화이트로 가득한 산빛과 대조되는 풍경은 약간은 촌스럽지만 유쾌합니다.

트램의 윗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꺼내 루체른 호수와 멀어져가는 시간을 기록합니다.

 

 

스위스의 집들은 대부분 지붕들이 가파롭습니다.

그건 눈이 많은 지역에 존재하는 가옥들의 특징이지요. 눈의

무게로 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루체른을 껴안고 도는 산새들의

풍경이 사뭇 거대합니다. 사진으로 찍기보다, 스케치북과 연필로 초벌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었죠.

 

저야 어차피 사진을 찍는 일엔 익숙치도 못하고

그저 간편한 카메라나 들고 다니며 찍는 통에 예쁜 자연의

색감을 담는 일은 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 조차도 귀찮고 싫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하는게 무슨 풍경 앞에서 인증이나 하려고 하는 일이라면

도대체 여행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저 스스로 혼란스러웠거든요. 차라리 자연 앞에서

사진기의 버튼을 누르기보다, 종이를 꺼내 산맥의 속살을 관찰하고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느리게 종이 위로 풍광들을 집광기가 빛을 모으듯

그렇게 모아 모아 집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리기 산에 올라 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돌아가며

인증샷을 찍고, 또 블로그에 올리는 건 무슨 심사인건지. 글을 쓰는 지금도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루체른에 오른 날은, 선장님의 말 마따나, 정말 1년 중 한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맑은 날씨였습니다. 푸른 루체른의 단면들을 담아내는 산새가 눈에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스위스의 산맥들은 하나같이 거대함 하나로, 그것을 빚어낸 신의 손길에 대해 변증합니다. 소소한

도시들의 섬세한 면면을 돋을새김해가며 찾아보는 여행도 좋지만, 결국 거대한 자연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여행자의 어쩔수 없는 마음이겠지요. 저 거대한 풍광을 빚어낸 힘들의 작용을 보면서

'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삶의 버겨움'을 털어내고자 하는 마음일 겁니다.

 

 

리기 마운틴은 최근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뷰 포인트로 뽑혔습니다.

리기 산의 중앙 산괴는 보통 50킬로미터 정도를 간격으로 해서 바지런하게 뻣어있습니다.

루체른과 주크, 라우에르 이렇게 세 개의 아름다운 호수를 껴안고 도는 리기는 가장 환한 전망을 자랑하지요.

해발 1,800미터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알프스의 정경은 숭고미에 관해 생각하게끔 합니다.

 

이 리기란 이름은 원래 Riginen이란 것에서 왔다고 해요. 이것은 산의 북면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산맥과 산맥의 단절부분을 의미하는 말이라더군요. 알프스 관광 초기

이 리기란 말은 라틴어인 Regina montium 즉 산의 여왕(Queen of the Mountains)이란 뜻에서

왔다고 합니다. 여왕이란 표현이 틀리지 않을만큼, 리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웃음 뒤에 칼을 감추고, 배면의 슬픔에 눌려있던 제 자신을 깨웠습니다.

 

"아.......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다시 살아갈것이라고"요

 

 

 

조셉 터너, <청색으로 물든 리기 산> 1841년, 종이에 수채, 개인소장

 

영국의 풍경화가 터너가 그린 리기의 풍경과 사진 속 풍경이 맞물려 돌아갑니다.

당시에도 화가들과 문필가들은 이 리기 산에 머물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거대한 힘에 이끌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심연의 색, 블루를 써서 산의 형상을 그려야 했습니다. 조섭 터너는 수채물감을 이용

1840년대 정점에 오른 영국의 풍경화 장르를 완성한 사람이지요. 루체른 호수에서 보이는 리기 산의 세 가지 빛깔의 풍경

레드와 블루, 화이트(마치 영화 제목 같군요)의 풍경을 남겼습니다. 각자 주간의 다른 시간 대에 빚어진 풍광의 유려한 미감을

담아냄으로써 리기산의 또 다른 면면을 드러내지요. 청색의 리기산, 이 작품은 해가 지기전의 풍경을 기록하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어슷한 태양빛이 밤의 서늘한 어두움을 따라 가는 시간의 정도. 청색과 옅은 검정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고요와 경이는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루체른을 여행하는 동안

이번 여행의 첫 기착지였던 비엔나에서

헤어진 소중한 이들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만남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제 미약한 여정을 채우더군요. 정말 신기합니다.

이 여행이란 것이 말이에요.

 

 

이 또한 이 산들의 빚은 이의 배려가 아닐까요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은 '숭고미'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숭고한 장소는 우리에게 우주가 우리보다 강함을,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여야 할 이유를 가르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 거대한 초월적 힘에 짓눌리지 말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고, 자연을 지은 조형자의 '힘'을 우리 안에서 재발견할 것을 요구합니다.

보통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깍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라고요.

 

 

 회사운영이나 글을 쓰고 번역하는 일도 답보 상태를 피하지 못했으며

용서해야 할 것들 앞에서 지지부진했으며, 존경했던 목사님은 폐암으로 생사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같이 약을 달고 살며 생을 연장하고 있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는 뒤엉킨 실타래를 안고 간 여행이었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너무 버둥거리지 않는것.

이 모든 것을 지은 조형자의 힘을 믿고 그의 배려를 기대하되, 너무 매몰되지 않기.

그렇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무거운 짐들은 저 거대한 산맥의 어깨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가볍습니다. 지금은.

 

 

풍경은 내 앞에 있고, 그 풍경을 받아들이는 내 영혼의 렌즈는

여전히 흐릿하지만, 자발적 귀향을 선택한 여행자의 마음 속에 이유없이 울컥 울컷

융기하는 생의 미열보다, 조금은 누그러진 긍정의 풍경이 자라납니다. 어느 생엔가 한결 깊어진

눈빛을 갖길 꿈꾸었는데, 이 루체른은 그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 낼 안경을 주었던 것이죠.

파란 빛의 열기구와 그 옆을 스쳐지나는 새들의 풍경이 안락하게 느껴지네요.

여행은 항상 제게 말합니다. "세상의 아픈 이들이 어디 너 혼자 뿐이더냐

잊지 말거라. 저 거대한 힘들을 조화롭게 연결한 이가 너의 미약함과

너의 가녀린 떨림 또한 이해하고 있음을......"

 

 

오스트리아 남부의 할슈타트 마을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긴 할슈타트나 이곳 웨기스나 호수를 껴안고 도는

마을의 실루엣은 대부분 사진 속 풍경이더군요.

 

 

푸른 하늘을 보는데

갑자기 응축되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올라와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주먹을 꼬옥 쥐게

되네요. 내가 얼마나 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패션 큐레이터란

이 일에 대해 회의도 느끼고, 불편한 가족 내의 일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되집어보면

이 모든 것이, 나 만의 작은 상처일 뿐임을 자연은 제게 확실하게 가르쳐주죠.

그래서 고마왔던 루체른의 리기 산행이었습니다.

 

 

루체른에서 돌아오는 길, 풍광은 더욱 맑아

푸른 수면위에 잔영으로 비치는 산색은 곱기만 합니다.

흐르는 것은, 흐름으로서, 고착되고 응고된 상처를 치유합니다. 흐름은

곧 순환이며, 그 순환의 힘은 견고한 모든 종류의 상처를 껴안고 흐른다는 걸 가르칩니다.

 이 여행길.....돌아와 생각해보니 너무 얻은게 많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여행은 감사의 마음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영혼의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을 이제 뒤로하고

더욱 빛나는 나날의 기억만을 채운 채, 앞으로 가야겠어요. 행복하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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