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춤을 춰라-발레<라이몬다>리뷰
월요일 저녁 예술의 전당 오페라 홀에 갔습니다. 큰 맘먹고 마련한 디올 옴므의 독특한 디자인 수트를 입는 호사도 부렸습니다. 저는 무용을 좋아합니다. 패션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가 무용입니다. 민속무용도 좋고, 발레와 현대무용에 이르기까지, 춤을 춤다는 것, 행위 자체를 좋아합니다. 되집어보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건은 바로 31살의 나이에 몸을 찟는 경험을 하며 발레를 배운 일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새벽이면 무용을 배운일은 책을 통해서나, 블로그를 통해서 자주 이야기 했습니다. 그만큼 인생에서 얻은 세렌디피티(우연한 만남)이었고 행운이었죠. 왜 이 경험을 유독 잊을 수 없을까 하고 다시 반문해 보곤 합니다. 퇴사 후 떠난 리프레시 여행이었습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남부 해안의 싱싱한 해산물과 신선한 야채들로 배를 채우고, 새벽이면 캔터베리를 관통하는 작은 물줄기를 따라, 별을 보며 달려간 곳이 무용연습실이었습니다.
몸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몸을 유연하게 만들고 근육 조직 하나하나를 긴장시켜 내 몸에서 발산하는 힘을 느끼는 일입니다. 견고한 몸의 기반이 없는 영혼과 예술은 안타깝게도 공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은 인간이 가진 유일한 사유의 공간입니다. 마음을 담는 그릇이니까요. 연습과정에서 언제나 상해의 고통이 따르는 무용수의 몸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입니다. 진정한 상처는 찬양할 수 없는 현존이며 통증이라지요. 무용수는 매일 매일 대면해야 하는 그 통증을 생의 일부로 안아내야만 무대위에서 인간의 눈을 위한 동작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번 국립발레단의 <라이몬다>는 볼쇼이 발레단과 국립 발레단의 투 탑 무용수들이 파트너십을 이뤄 공연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발레단이 한국의 발레단을 자신의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것. 그 자체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지요. <라이몬다>는 12세기 십자군 전쟁의 발발 속 헝가리 공화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기사인 장 드브리엔과 약혼자 라이몬다, 그녀의 사랑을 빼앗고 싶은 나쁜남자, 바로 사라센의 압데라흐만이 등장합니다. 군주의 유혹과 협박을 이겨낸 라이몬다가 기사 장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고전 발레는 아주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작품은 19세기 말 유럽을 강타한 이국풍의 트랜드가 삽입된 터라, 스페인 민속춤과 아랍풍의 춤들, 헝가리풍의 캐릭터 댄스까지 포함되어 다양한 춤의 성찬을 선보입니다. 한번에 다 맛보기엔 배부를 정도지요.
이번 <라이몬다>를 연출한 유리가로비치입니다. 그의 삶은 곧 볼쇼이 발레단의 생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33년간 볼쇼이의 수장을 맡아 발레단의 모든 레퍼토리를 재탄생 시킨 발레 마스터입니다. 그가 초연한 돌꽃(Stone Flower)는 세계적인 무용 레퍼토리가 되어 남아 있죠. 돌꽃이란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보석 세공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불멸의 보석 컬렉터들'이란 책을 번역하면서 다시 한번 작품을 뒤적여 봤네요. 이번 <라이몬다>작품의 안무를 본 소감은 한 마디로 명불허전입니다. 대가들의 작품엔 항상 축약할 수없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춤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양한 요소들을 섞을때도 절제와 균일의 미를 놓치지 않지요. 특히 사라센 궁정에서 벌어지는 이국적인 춤의 향연들이 눈에 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반복된 동작들의 유희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반복(repetition)이란 요소에 끌립니다. 반복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낡아버리는 운명에 처하거나, 아니면 이전의 것을 압도하는 풍부함으로 되살아나거나 하는 두 길의 운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사태, 동일한 작품 속 서정성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대부분의 작품은 생의 절박함을 끌어내지 못하고 주저않게 되죠. 반복은 낡고 지루한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일한 서정을 밀고 나가기도 쉽지가 않은 것이죠. 새로운 것, 신상품, 뜨는 것을 광적으로 쫒는 사회일수록 더욱 과거의 요소들을 반복하며 답습해야 하는 장르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이 신선함이 아닌 그 자체의 노예가 되어 이전의 옷을 벗고 아무 옷이나 걸치는 것도 만만찮게 천박합니다.
안무가인 유리가로비치가 놀라운 이유는 진부함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그의 시선입니다. 반복된 동작은 과거나 지금 동일하지만, 그 동작을 통해 실어내는 감정의 선과 시대의 정서가 각자 다르다는 것. 토로하기 보다 절제된 우아함을 견지하는 그의 노력이 돋보이는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반복된 훈련을 통해 비루한 인간의 몸을, 활기찬 생의 그릇으로 빚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발레리나에게 몸은 악기입니다. 현은 떨림을 통해 대기에 음이란 자식을 잉태하듯, 무용수는 공기화된 몸, 공기처럼 가벼운 몸을 통해 자유자재한 존재의 형상을 그려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저기로, 지상에서 꿈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혹은 미래로, 또는 환상속으로, 이동하며 비약합니다. 음악은 연주를 통해 무한정 퍼지며 스며들고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극장 속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듯, 무용은 내 안의 날숨과 들숨이 세상을 향해 뚫어놓은 통로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비루한 일상이 사실은 무용공연에서 보는 동작과 다르지 않고, 생을 찬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한, 우리의 모든 동작이 곧 무용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죠. 무용을 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을 반복해서 내 안에 누적시키는 일입니다. 올 가을은 유독 무용공연이 많습니다. 연극 올림픽도 열리고 SID 국제 댄스페스티벌도 다가오네요. 10월은 연극과 무용리뷰를 올리는 것 만으로도 벅찬 시간들이 될 것 같습니다. 무용은 꿈을 인화한 한편의 시입니다. 올 가을, 추일서정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기전 한강변으로 나가 다시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아한 몸의 아름다움과 블로그의 글이 닮아가길 바랍니다.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겠지만 지치지 않고 올 해 마무리 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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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후 2층 VIP룸에서 다과를 하다가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님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단아하고 우아한 기품이 몸선의 구석구석을 그리는 분이지요. 언론에서 이야기 했던 것 말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하고 왔습니다. 다음에 한번 제대로 다뤄보고 싶은 분이었거든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