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박물관 소장전-규방의 꿈, 사랑을 탐닉하다
개인적으로 자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동 서양을 통털어 이 자수란 기술은 옷을 비롯해 생활의 면면을 장식하는 테크닉이자, 시대의 무늬를 각인해내는 일종의 도장이었습니다. 한 뜸 한 뜸 가닥마다 혼으로 엮어낸 꼬인 매듭이 모여 숨을 쉽니다. 서양복식사를 연구하면서 프랑스 자수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요. 그 테크닉의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세계 본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한국자수박물관전에 다녀왔습니다. 최근 한국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재발견이란 화두를 풀어가려는 노력이 속속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선비문화와 목가구 전을 통해 조선 선비문화의 정갈하고 세련된 미감을 '일상의 오브제인 가구'를 통해 보여준 신세계 갤러리의 차기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는 자수 소장가들의 노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님이죠. 숙명여대 자수박물관의 정영양 선생님과 더불어 자수 분야의 대표적인 컬렉터입니다. '복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창'으로 한국의 전통과 서구의 영향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보는 것이 제 꿈인지라 제겐 항상 역할 모델 같은 분들이죠.
자수 병풍에서 한국 자수 전통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수를 단순히 색로 그리는 그림이란 관점에서 벗어나, 세련된 배색과 회화적 요소의 아우름, 무엇보다 현대 그래픽회화에서 주목하는 디자인의 요소와 배색의 조화를 살펴보면, 현대미술에 그대로 접목될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하다는 점을 알수 있을 겁니다. 병풍은 이동이 가능한 일종의 벽입니다. 우리 선조는 이 병풍을 통해 공간을 창조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해왔죠.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놀라운 발명품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공예정신과 회화가 결합되고 '세상을 향한 화해의 꿈'을 꾸는 여인들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꽃무늬 비단자수쌈지_11x22cm_조선 19세기 면 색실누비쌈지_15.5x25cm_조선 19세기
규방이란 말 그대로 양반집 규수들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이 금지된 여인들은 밀폐된 공간 속에서, 세상을 향한 화해의 꿈을 꾸었을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의 규방공예문화지요. 전통자수는 규방에서 한 땀 한 땀 정성과 기원을 담아 지어졌고 밝고 따듯한 오색으로 꾸며 아름다운 색채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계를 그립니다. 용도와 메시지가 정확하다는 점에서 응용미술과 순수미술의 세계가 합쳐진 통합 미술이지요. 한국 자수의 우수성은 외국에서 50여 차례가 넘는 특별 초대전을 통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꽃무늬 자수바늘집_3x11cm_조선19세기 꽃무늬 자수바늘집_4x12.5cm_ 조선 19세기
이번 전시는 귀국 보고전의 형식을 띠고 있죠. 이럴 때 보는게 좋습니다. 자수 박물관에 가도 외국에 소장품이 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온 적이 많거든요. 자수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수 병풍을 비롯, 방장, 완대, 굴레, 바늘집, 쌈지 등 19세기 조선의 자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눈에 펼쳐집니다. 침선(바느질)을 통해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던 당대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노라면, 조선 여인의 손끝에서 아우러지는 극미의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 전통자수의 경우 꼰사(꼬아서 만든 자수실)를 주로 활용하여 전통적인 자수를 재현하거나 규방공예 작품 활용을 위한 소품자수를 주로 하지요. 색상면에서 인류의 근본색인 오방색(파랑,하양,빨강,검정,노랑)을 기본으로 하며 오방간색을 활용하여 화려함과 더불어 단아한 이 땅의 정서를 토해냅니다
“수(壽)”자무늬 방장_220x142cm_조선19세기 “희(囍)”자무늬 방장_220x142cm_조선19세기
방장이란 외기를 막기 위하여 방안에 치는 휘장을 말합니다 여름에 사용되는 발과는 달리 겨울용으로 주로 모직물과 견직물로 만들지요. 벽체에 의지하고 천장에 가까운 부분으로부터 늘여지도록 설치하는 장치로 가방(假房)이나 침상의 네 벽에도 설치되는데,우리 나라에서의 방장 사용은 삼국시대부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십장생 자수완대_12x13.5cm_조선 19세기 “희(囍)”자무늬 자수완대_10x13cm_조선 19세기
완대는 허리띠입니다. 완대라 함은 허리띠를 풀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서양도 이 허리띠의 발명 이후로 복식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요, 전통 완대를 보니 데님 진을 입고 허리띠로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예전 여인들은 이 자수를 통해, 가족의 번영과 평안을 희구했습니다. 혼례나 아기의 첫돌에도 생활의 번영을 기원하는 무늬를 삽입했지요.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생의 순간들을 오롯하게 정렬하고 나가려는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기에, 일종의 정신의 예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땀 한 땀 자수가 지나간 자리는 혈흔의 자리처럼, 우리들을 이끄는 거겠지요. 그렇게 이 못난 남자들이 만든 세상,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 지배와 타자에 대한 배척이 일종의 문법이 된 세상을 껴안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괴테가 말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추석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정담도 나누시면 행복한 나날의 조각들을 짜깁어 가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사진제공 : 신세계 갤러리 * 본 리뷰는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합니다. 무단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