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스물다섯을 극복하는 법-그림일기를 쓰자
S#1 골때리는 스물다섯이 사는 법
『하하 미술관』을 쓰면서 28명의 작가를 소개했다. 이후로 책 출간을 인연으로, 소개된 작가들과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28 명 작가 중에 3명이 나보다 터울이 어리고, 4명은 동갑내기였으며, 대부분은 연장자였다. 그래봐야 40대 중반을 넘어서진 않았지만.
하하미술관에 소개된 작가 중에 조장은이란 27살 작가의 작품이 재미있다는 촌평을 자주 올려주신다. 그럴수밖에 그녀의 그림 일기엔 우리가 지나온, 혹은 굳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왔던 젊은날의 응어리 같은 것이 뜨겁게 뭉쳐있다.
인연이란 것이 재미있다. 우연하게 블로그를 쓰면서 독특한 느낌의 그림을 발견했다. <남자들이 여자의 생머리를 좋아하는 이유>란 그림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다음 메인에 뜨면서 10만명이 넘는 분들이 조장은의 그림을 봤다. 블로그가 매개가 되어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개인전에도 들러 작가와 작품을 봤다. 이야기도 듣고 말이다.
그녀는 27살이다. 이제 두달만 있으면 28살이 될 것이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내친김에 석사까지 동양화로 일관성을 유지, 지금은 행복한 그림쟁이로 산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그녀는 '이대나온 여자'다. 사실 미술계에서 조금씩 작가들을 알아가면서 난 '이대나온 작가'들과 썩 사이가 좋지 않다. 아니 내가 피하는 편이다. 실력없이 학교 명판을 들이미는 어설픈 작가들이 꽤 많다는 생각을 했다.
오해는 말자. 이대나온 훌륭한 작가들도 수없이 많으니까. 난 실력과 소신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단 학교 하나로 들이미는 사람은 사절이다. 이건 뭐 꼭 미술계 뿐만이겠나. 내가 만난 수많은 박사급 엔지니어들도 그런 자들이 많았고,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은 많았다. 요즘은 학벌이, 학교의 졸업장 자체가 그 사람의 실력을 인증하는 바로미터가 되는 시대가 아닌것 같다. 그렇게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시간, 작가 조장은의 그림일기전을 보러갔다. 조장은은 항상 그림일기를 쓴다. 어린시절 크레파스로 그렸던 그림일기대신 캔버스와 한지에 유화와 묵을 이용해 그린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그녀는 흔히 말하는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이대나온 여자라고 이 공고한 경제난국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 게다가 본업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지 않는가?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는 이 땅의 수많은 예술가 중의 한명이다. 집에서 선을 보라고 꽤나 괴롭히는 모양이다. 이번에 낸 그녀의 그림일기를 보니, 얼굴 때문에 작업했던 남자를 놓쳤다며 쌍까풀을 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거짓말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어정쩡한 맞선자리에 나간다. 수영장에 가고 싶어도 일명 쏘리라인을 가진 덕에 시각공해오염방지차원에서 꽤 오랜동안 비키니를 자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조장은은 홋겹눈이다. 쌍까풀 수술을 해달라고 대학시절 부터 외쳤으나 아빠의 단호한 거절 아래, 성사되지 못했다. AS 없는 공장이 어디있댜며 한탄도 했다지만, 왠걸 최근 본드걸의 이미지로 다시 한번 남자들을 홀릭하는 연아는 홋겹눈이다. 그런 그녀를 따라 당당하게 큼직하게 눈을 뜨고 다닌다. 그녀는 88만원 세대의 일원이다. 특히 예술가에겐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에는' 딱히 할줄 아는게 없는 그녀에겐 현실이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참으로 당당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장은 작가가 <골때리는 스물다섯-조장은의 그림일기>란 책을 펴냈다. 글이 너무 없어서 좀 아쉽고 산만하긴 하지만, 역시 오랜동안 그려온 그림일기를 보는 재미는 딱히 나쁘지 않다. 그녀의 책에 추천사를 써줬다. 너무 속보이는 짓 같긴 하지만 대학원 졸업이후로 '고학력 청년실업에 일조'했다며 자조하기 보단, 반복해서 칠할 수록 더욱 짙어지는 분채처럼, 붉은 색을 써서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는 그녀가 좋다.
맞선을 보러 가서, 직업이 '그림그리는 거'라고 했다가 재차 직업이 뭐냐고 묻는 남자를 보며, 본업이 뭐냐고 묻는 거 같아 불편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도 쉬크하고, 어디로 갈지 모른채 달려가기 보다는, 천천히 자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장은씨. 난 이런 장은씨가 좋다.
누구에게나 달려온 20대가 있다. 이제 30대의 마지막 능선을 타는 나는, 그때를 회상할 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란 말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물론 지금의 내게 만족하고, 실수 투성이었던 그때를 굳이 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리라. 그러나 20대 시절, 내가 만난 수많은 우연들이 하나의 음이 되고 음계가 되고, 결국 음악이 되어 연주 속 리듬에 내 몸을 맡기라 한다. 20대 때와 다른 건 연주가 끊어질 위험이 좀 줄어들었고, 리듬이 강건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녀의 그림 속엔 우리가 지나온 혹은 감내해야 할 청춘의 자화상이 그려져있다. 유쾌함과 쿨함을 가장한 표정 안엔 시린 슬픔이 녹아 있다. 그런데 일기를 쓰며 그녀는 당차게 말한다. 용기를 내라고. 세상을 향한 연서를 써보자도 말이다. 내가 조장은의 그림을 참 좋아라 하는 이유다. 빛의 사서함을 열고 나도 언젠가는 두려웠던 20대의 추억을 써 보내는 날이 오겠지.......늦가을 햇살에 수확을 기다리는 붉은 사과처럼 무르익기까지 알레그로의 속도로 기다리는......울 장은씨를 부탁해
뱀발.....*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이 책은 그냥 그림일기책이라고 보는게 편하다. 많은 텍스트를 요구했다면 캔버스에 시각성을 옮기는 걸 주 작업으로 하는 화가에겐 힘든 일이었을테고. 그만큼 편안하게 넘기기에 좋다. 20대 말기, 30수로 접어들기 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찾아온다는 마수를 깨뜨릴 부적을 기대하면 안된다. 이걸 그릴 수 있는 작가는 세상에 없다. 어린시절 습관적으로 썼던 그림일기를 어른이 되어 써보려니, 예전의 필치가 전혀 나오질 않는 현재의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짓을 과감하게 질버러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렇게 책을 읽어보실것. 그리고 날아라.....20대의 중반에 선 이 땅의 진정한 국가대표들아......형아도 열심히 살아갈께 힘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