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에 담아야 할 것들-영화'미래를 걷는 소녀' 리뷰
S#1 영화 <동감>과 <미래를 걷는 소녀>
-섬세한 시간의 균열을 메우는 착한 판타지의 힘
대학특강을 갔다. 인터넷이 자유로운 카페에서 글을 쓰다 격세지감이란 케케묵은 표현을 떠올렸다. 내가 캠퍼스를 걷던 90년대 초는 인터넷과 무선통신, 휴대폰과 같은 용어가 세상에 나오기 전이다, 당시 활동하고 싶었던 동아리가 아마추어 무선동아리 햄이었다. 돈이 많이 든다는 말에 겁이 났지만, 햄 라디오 하나면 있으면 시험절차를 거쳐 자격증도 따고 같은 취미를 가진 세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뿅 갔던 시절이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트위터로 몇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이 화두인 세대지만, 그때만 해도 국가적 장벽을 넘어 세계와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상상력이 필요한 행위였던 시절이다.
후배와 함께 우연하게 본 한편의 영화. 바로 '동감'을 본 것이 2000년. 참신한 유지태와 청순가련한 김하늘에게 필이 꽂혔던 시절이다. 영화에서 유지태는 2000년에 살고 있고 김하늘은 79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간 영문과 학생으로 분했다. 고물 무선기가 계기가 되어 둘 사이엔 시간여행이 시작되고, 21년이란 시간의 격자무늬를 넘어 사랑에 빠진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등장하던 그때, 영화는 아마추어 무선통신으로 연결된 사랑을 말한다. 지금처럼 화상통화를 할수 있는 시대가 아니란 점. 오로지 목소리의 톤과 빛깔, 그 사람의 말과 말 사이의 휴지, 호흡의 정도를 느껴가며 말 할 수 있어 더욱 좋은 시절이다. 사랑의 무늬를 빚어내는 건 아날로그의 느린 호흡이 어눌하지만 어울린다.
영화 '동감' 속에서 그들은 뼈아픈 사랑을 경험한다. 시간의 격자를 뛰어넘는 사랑은 알레그로의 템포로 흐른다. 순백의 마술같은 사랑 이야기는 초록빛 정조가 강하게 드러난 영화 포스터처럼 초록빛 이끼가 낀 기억의 창이 되어 서로를 비췄다. 미장센과 탄탄한 이야기 구성, 임재범의 보컬까지 하나하나 기억나는 영화다. 시간을 넘는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다. 김민종이 무사로 분했던 <귀천도> 이 영화에 여자주인공으로 나왔던 수림이는 교회 후배였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다. 궁금하다. 전지연과 이정재가 빨강색 우체통과 그림같은 강변가의 집을 배경으로 가슴서린 사랑에 빠졌던 <시월애>도 빠질수 없다. 영원히 이뤄질수 없는 불확정성의 원리, 사랑.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로맨스물의 매력은 사랑은 시공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는 판타지에 있다. 현실계에선 불가능한 환상, 그래서 끌린다.
S#2 미래를 걷는 소녀-미호, 소년을 만나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사랑은 예쁘다. 두 개의 일치할 수 없는 시간대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스토리의 힘은 무궁무진한 변수로 채워질 수 있다.다. 오늘 소개할 <미래를 걷는 소녀>는 지금까지 설명한 시간가로지르기를 소재로 한 로맨스 영화다. 2009년 동경, 출판사를 운영하는 엄마는 돌아가신 아빠를 배신(?)하고 문학과 교수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 엄마가 영 마뜩찮은 16세 소녀 미호, 그녀의 꿈은 판타지 소설가다. 미래의 아빠(?)와의 상견례 시간, 화장실에서 온통 게임만 하다가 입이 불어터져나온 그녀.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는 길, 갑자기 지진이 났는지, 그 와중에 핸드폰을 계단아래로 떨어뜨린다.
어라? 이상한 일이 생긴다. 떨어뜨린 핸드폰이 타임웜홀(시간의 벽)을 타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대,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돌아오던 소설가 지망생 미야타의 머리로 핸드폰이 떨어진다. 영화 <동감>에서는 개기월식이 계기가 되어 고장난 햄 라디오에 불이 켜지더니, 이번엔 달빛 하나면 된다. 메이지 시대, 거의 100년 전의 남자와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할수 있다니, 핸드폰이 그만큼 잘 터진다는 걸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보다. 다만 도코모의 PPL이 속보일 정도여서 이건 패스!. 어찌되었든 핸드폰을 통해 당시 최고의 문필가 나스메 소세끼 선생의 문하생인 그와 판타지 소설의 여왕이 되고 싶은 미래의 소녀가 만난 것이다. 시공을 넘어 대화를 나누고 데이트도 한다.
100년 전통의 카레전문점 마츠야 사쿠라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그들. 세월의 결을 버틴 오랜 가게가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카레값은 메이지 시대엔 10전, 2009년엔 700엔이라는 엄청난 물가차이가 있을 뿐. 어디 이뿐인가? 미호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며 들어간 가게에서 그는 예쁜 거울을 산다. "이 거울 싸주세요 100년 후에 어떤 여자가 찾아올 겁니다. 돈은 후하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문제는 그 박물장수집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다. 오랜 세월을 두고 찾을 수 있는 랜드마크가 있다는 점. 서양의 재개발은 150년을 단위로 하는데 비해, 15년도 안되 재개발로 부동산 광풍을 만드는 한국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어렵지 싶다. 적어도 영화 속 이런 삽화를 장면화하진 못할테니 말이다.
미래를 걷는 다는 뜻의 미호(未步)와 과거의 시간 속에 있는 남자 미야타 토키지로. 둘은 시간의 벽을 넘어 서로의 상처들을 극복한다. 소설가 지망생으로 퇴짜만 맞던 그에게, 미래의 소녀는 새로운 아이디어 자체다. 이후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할란다. 마마나 호환보다 무섭다는 스포일러를 올릴 수는 없으므로.
과거의 시간 속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에게 중후한 인생의 지침을 듣는 일. 이런 류의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진부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진부함이 싫지 않은건, 우리가 과거의 텍스트를 읽으며 지혜를 찾고자 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제 남자는 황당한 공상과학이나 판타지가 아닌,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쓴다. 100년후의 미래를 걷고 있는 한 여인을 위한 절절한 러브레터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러브레터는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온다. 100년후의 연인을 위해 골수의 피를 찍어 내려간 글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배운다. 연애편지를 쓰는 진정한 목적은 '사랑의 고백'이 아닌 '그와 나의 성장'에 있음을 배운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우리를 키운다.
이 영화는 스토리의 배열과정과 장면화, 극적 구조등 그 어떤 것도 기대하면 안된다. 참 착한영화다. 착한판타지. 가을엔 착한 영화를 보며 좀 가다듬어도 되지 않겠나? 여러분이라면 러브레터엔 무엇을 담을 것인가? ( )과 ( ) 두개 정도 댓글로 알려주면 좋겠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이야기는 힘이 세다. 소녀가 소년을 만나고, 그의 어께에 머리를 기대고, 쨍한 사랑노래를 저녁 놀 아래 함께 부를 수 있다면 하는 타령이 좋은 당신. 진부한 사랑의 수사학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지속가능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꿈꾸지만, 끝내는 이룰수 없는 현실에 기인한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선 막막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 결국은 어긋날 수 밖에 없다는 걸 전제로 하기에, 이런 이야기는 순환적으로 리메이크 된다. 스토리 앞에서 관객들은 슬슬 눈물을 훔친다. 나도 그랬다......가을을 타냐고? 뭐 그런건지도......그나저나 왜 이런 영화는 상영관이 몇개 되지도 않는 것인지, 가을이잖아......극장주들이여 사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문을 좀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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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사랑을 꿈꿀 나이가 아니란 걸 확연하게 알게 될때? 적어도 영화 속 여주인공과 '사귀고 싶다'가 아니라 '난 언제쯤 저렇게 예쁜 딸을 낳아서 키울까"라고 생각이 바뀔때가 아닐까?. 카호가 너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