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나의 행복한 레쥬메

월간 미르 4월호에 기고했습니다-아직도 청을 못보셨습니까

패션 큐레이터 2009. 4. 6. 14:47

 

 

 

상상 이상의 창극을 만나다

봄 기운이 완연하다. 겨우내 얼어붙은 자연이 깨어나며 토해내는 소리를 내면 깊이 듣는 시간. 봄은 청음의 계절이다. 주변부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생명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봄을 즐기는 방식이다. 엄마와 함께 한국의 창극 <>을 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현대화된 한국의 창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어머니와 국립극장에 갔다.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이 한창이었고 오늘 소개할 한국의 <>도 이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다.

 

처음엔 창극이라 해서 약간 머뭇거렸다. 대학시절 안숙선 명창에게 한 학기 동안 판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선생님의 단아한 모습에 반했던 대학4학년 졸업을 앞두었던 학생은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다. 창극 <>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창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충분히 깨뜨릴 만한 작품이었다. 대학시절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며 란 것이 각 지역별로 소리를 담는 방식이란 뜻을 겨우 배웠던 시절. 한국의 소리는 여전히 우리 내 정한과 슬픔을 담는 도구이지만,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는 국지적인 예술장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원래 창극이란 청음에 기반하는 예술이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전통은 연극의 다양한 면모를 섭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 피어났다. 창과 연극 무용이 어우러진 한편의 종합예술로서의 창극 <>이 완성된 것이다. 놀라왔다.

 

변화와 시도가 새로운 청을 만나다 

서양과 한국의 악기가 서로의 몸을 침투하며 잉태한 소리는 남달랐다. 첼로의 현과 해금의 현이 만나 그 속살을 드러내며 때로는 에로틱하게, 때로는 구성지고 슬프게 그 빛깔의 옷을 입혔다. 배우들의 창은 극의 전개 마디마디에 필요한 감정의 깊이를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소리의 힘이 이렇게 강력한 걸까? 극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건 우리 내 악기가 우리의 정서를 짙게 표현하는 질료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국악이 관현악의 형태로 제시됨에 따라, 한 사람의 완창으로 마무리 짓던 소리의 답답함은 <>을 보며 한국적 오페라를 보는 관객의 마음으로 변해버렸다. 나처럼 국악에 무지한 사람들에겐 이런 시도가 신선하고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무리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극 전반에 대한 만족도도 커질 수 밖에. 무대와 조명 또한 서양의 문법을 포섭하지만, 그 속에는 관객을 향해 열린 창과 같이 투명한 무대로 변화했다. 그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함께 웃고 즐기고 피어난다.

 

서양 음악극은 귀족이란 정치적 계급의 산물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중 속으로 파고 들며 오늘날의 형태와 문법을 갖추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창극은 철저하게 기층민중의 구성진 소리에 바탕을 둔다. 그들을 둘러싼 부침이 심했던 정치적 환경과 역사가 그 소리를 형성하게 한 힘이었다. 그래서 살갑다. 결코 역사와 유리되지 않으며, 우리 내 삶의 질곡한 면모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때 소리는 단순하게 목에서 발성되고 완성된 사물이 아니다. 끊임없이 현재 진행형의 시간 속에 성장하는 유기적인 산물이 된다. 창이라는 우산아래 무대와 조명과 의상과 연기가 하나가 되어 촘촘하게 생의 풍경화를 그린다.

 

봄은 청음의 계절이다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선 강한 연극적 에너지가, 청의 통곡과 창을 통해서 극대화 되고,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폐부를 찌른다. 촘촘하게 구성된 집단 씬(scene)은 우리 내 사계절의 변화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 속에는 소리를 통해 토해진 젊음의 시간과 노년의 시간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툭하면 <심청전>을 가리켜 자식이 가져야 할 효의 절정인양 표현한다. 분명히 밝혀둔다. 심청은 이전의 우리가 가졌던 너무나도 친숙해서 듣기만 해도 진부하다고 느낄 <심청>의 이미지를 180도 변화시킨다. 극 속에서 심청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뛰어든다. 연꽃 위에 실려 지상으로 부활한 청은 자신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왕비의 삶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물론 원작을 비틀긴 했지만 결론의 의미가 흐려지진 않는다. 아니 더욱 공고해졌다. 죽음을 연출하는 무대도 서구연극의 방식을 빌어 원형무대와 7.5도 정도가 기울어진 경사 무대로 설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극에 빠질 수 있도록 했다원형 무대를 쓰게 되면 동선의 깊이가 커지고, 극적 감정의 표현이 더욱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한국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을 이야기 할 때 '정한의 세계'라는 식의 협착한 느낌을 남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맨날 한국적 '한의 구조나 정서'라는 도식에 빠져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타자를 구원하는 숭고미의 세계를 그려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은 <>을 통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하늘에선 꽃 비가 내리고 그 위로 서서히 걸어가는 모습에서 씻김의 의미와 그 속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의미를 떠올렸다. 내게 있어 창극 <>은 일종의 성장소설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나이 15, 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나이가 15세란다. 청이가 푸른 멍울진 바다에 몸을 던지는 건, 피 끓는 우리 내 청춘의 시간이 감내해야 할 상처의 몫이 아니었을까? 내가 창극 <>에 훌쩍 빠져버린 건, 극의 전개과정과 결론까지, 마치 청신한 대나무 마디마디 마냥, 촘촘하고 이음새 없이 연결된 간결함과 곡 진 우리의 소리다. 청음이란 경험이 이렇게 신선하고 행복할 줄이야. 아직 창극 <>을 보지 않은 이에게 한마디만 하고 싶다. 봄을 즐기는 색다른 방식, 바로 소리를 듣는 시간 속에서 찾아보라고 말이다.

 

국립극장 월간

<미르> 4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