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의심스러울때-영화 '다우트' 리뷰
S#1-지금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벌써 5년전이군요. 2004년 브로드웨이에서 한편의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계약업체의 수석 매니저가 연극을 좋아한다며, 엉뚱하게 저녁을 먹고 보러갔던 한편의 드라마였죠. Doubt : A Parable 이란 작품의 부제가 기억납니다. 그때 클라이언트에게 우리 회사의 조건과 파트너십이 의심되느냐? 그러길래 이렇게 우회적으로 나를 놀리는 것이냐고 저도 받아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본 이 연극의 느낌이란 한 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연극을 보고 한동안 마치 유령에게 쫒기는 마음으로 현재의 제 자신을 되돌아 보기도 했죠.
그만큼 한편의 연극이 가져다준 충격의 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기존 교회에 대한 불만과 15년동안 출석한 교회가 점점 정치교회로 변모되어가는 걸 보면서 끝내는 교회를 나와야 했지요. 퓰리처 상에 빛나는 작품을 연극 무대로 옮겨 토니상을 비롯 그 해 온갖 연극상을 휩쓸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보았던 작품이 이제 영화화 되어 눈앞에 펼쳐지네요. 출연한 배우들 또한 기라성입니다. 메릴 스트립과 선굵은 연기로 알려진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적요한 카톨릭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강인한 에너지가 맞붙습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다우트, 말 그대로 의심/의혹입니다. 연극의 부제를 보면 Parable (우화)란 말이 붙는 것으로 볼때, 의심이란 일반적 행위에 대한 우화로 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열린 구조를 지향하며 끝까지 결론을 유보합니다.
결국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의심하는 자 vs 의심받는 자의 편 중에 어떤 곳에 설 것인지를 묻지요. 이 영화는 1964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의 미국 사회를 다룹니다. 브롱크스 지역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활기차고 유연한 사고로 아이들을 지도하고자 하는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와 깐깐한 원칙과 엄격한 훈육방식으로 아이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 분)가 등장합니다.
케네디의 등장은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뉴 프론티어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정치적 기류는 바로 보수적인 카톨릭 학교에 최초로 흑인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하지요. 물론 학내에선 이탈리아 아이들의 왕따와 폭력이 그치지 않지만, 플린 신부는 그때마다 도널드를 감싸고 돌며 개인적인 호의를 베풉니다.
그러나 도널드에 대한 호의는 플린신부와 도널드의 부적절한 관계로 확장되는 듯한 메세지를 던지며 영화는 갈등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이들에겐 무조건 만년필을 사용하며 펜멘십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엄격한 벌을 내려 분위기를 잡는 그녀로서는, 자유주의적인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터에, 제임스 수녀로 부터 '신부가 도널드와 이상한 관계를 맺는 것 같다'고 듣게 된 한 마디의 말로, 그녀는 머리 속에 이미 답을 내려버리고 말죠. 그때부터 그녀와 신부 사이에 음모와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갑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신부가 도널드를 성적으로 유린했는지의 여부를 밝히지 않습니다. 도널드의 엄마를 등장시켜 도널드가 다른 아이와 다른 성적 지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도록 단서를 던지죠. 영화는 '의심'과 '의혹'이란 감정이 갖는 힘에 대해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영화의 시작 플린 신부의 설교로 시작해서 알로이시스의 절규로 끝이 납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란 성경 상의 구절이 힘을 갖기 보단,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체화 하고, 이미 내 안에서 '진실'이 되어버린 믿음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지요. 드라마는 연극을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철저하게 수도 학교 안을 배경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지울수 없도록 전개됩니다. 그만큼 줄거리의 개요 보다는 각 연기자의 심리적인 표현에 주목해야 하고, 대사와 대사 사이, 행간을 읽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매를 들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 여자와, 교회가 사회 내의 가족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믿는 남자. 이 두 입장이 만들어내는 각자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왜 극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Doubt : A Parable 로 했을까요? 믿음에 대한 정치적 우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1964년-68년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북미사회는 정치적 격변을 경험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통치능력에 대한 찬미가 공공연한 수업의 대상이 되던 시절에서, 흑백갈등과 다민족 국가와 관용의 문제, 정치적 순혈주의와 자유주의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며 싸웠습니다. 군산복합체 세력에 의한 케네디의 암살로 자유주의가 힘을 잃는 듯 했지만, 보수적 기층사회는 그 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던 그때입니다.
신에 대한 신앙도 그렇겠지요. 단지 진화와 창조론이 부딪치던 시대가 아닙니다. 바로 교회 내에서도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시적표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측이 부딛치던 시대였으니까요. 플린 신부가 도널드를 성적으로 희롱을 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추정과 그러했으리란 믿음만 견고하게 남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 강해 모든 걸 현실로 만들지요. 그렇다고 해서 알로시우스 수녀가 나쁜 사람이다? 라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그녀는 단지 예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고, 그 때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처가 깊은 영혼의 트라우마가 되어 지워지지 않았고, 그 상처는 유사의 일이 발생할 경우, 힘과 폭력, 강압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자신만의 선'을 성취하도록 유도합니다.
모든 걸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린 어떤 태도를 흔히 취하게 되는지, 이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보고 나서 많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그 만큼 우리 안에 있는 맹신적 태도, 믿음을 가장한 자신의 증오심,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내 안의 정의감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지요. 영화는 끝까지 신부가 도널드를 성폭행했는지의 여부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서, 관람자에게 너무 큰 짐을 남깁니다. 명쾌한 결론은 없습니다. 양측을 살펴보며, 당신은 어떤 쪽에 가까운지를 자문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적어도 그 믿음의 강도가 너무 커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야 할 정도가 된다면, 그를 사회에서 배제시켜야 할 이유와 증거를 명확하게 얻고 공감을 얻는 일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단순히 경험으로 난 안다. '그럴것이다'란 추정이 얼마나 무서운 바이러스처럼 내면을 파고드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심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확신의 반대입니다. 그러나 확신과 의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의심의 과정을 넘어서 우리는 확신이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제자 도마의 의심. 그 의심하는 자에게 예수는 자신의 못 박힌 손을 보여주고 확신시켜줍니다. 단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 의심하는 인간을 신이 비난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서구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이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한 축을 이루었듯이, 여전히 이 문제로 부터 우리 모두 자유롭지 않음을, 모순되는 입장 사이에서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영화. 다우트는 그만큼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의 입장 중 어디에 서 계신가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