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개가 필요한 까닭-영화'볼트'에 대한 단상
볼트
(우리집 강아지는 복슬 슈퍼독? )
영화 <볼트>를 봤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10여년 전 짐 캐리가 연기했던 <트루먼 쇼>와 동일하다. 그렇다고 영화의 가치가 감소하진 않는다. 오히려 <볼트>는 이전의 <트루먼 쇼>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자기 결정성'을 동물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인간과 동물의 감성적 연대가 만들어낸 세계는 따뜻하다. 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밝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야기의 원 재료가 된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주인을 잃어버린 개가 대륙을 횡단해 주인을 찾아온 이야기의 원전은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도된 바 있다. 인간의 관점에선 놀랄 뿐이다.
주인의 냄새 하나에 근거에 그 먼 거리를 되돌아오는 개의 이야기 <볼트>. 볼트는 자신의 이름으로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슈퍼독이다. 그는 위험에서 자신의 주인인 페니를 구하고 악당 녹색눈과 싸운다. 눈에선 초강력 레이저가 나오고, 줌줌이란 주문만 외치면 초스피드로 질주도 하고, 주인을 이끌고 특수요원 임무를 완수해내는 완벽한 강아지로 분한다.
문제는 볼트가 자신의 초인적인 힘이 실제인 줄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고, 스튜디오에 갖혀산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꿈의 공장 헐리우드에서, 통조림 찍듯 꿈을 제조하는 시스템의 차가운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진실성을 대비시킨다.
스튜디오를 나오게 된 것도, 결국 헐리우드가 연출하는 드라마 속, 극적인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주인 페니를 일부러 납치하고 이를 구하려다, 비행기에 실려 뉴욕에 보내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화를 좋아한다. 동물의 이야기가 사뭇 동물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반영임을 깨닫는다. 텔레비전 드라마 매니아인 햄스터 라이노와 유기 고양이 미튼스에 이르기까지, 볼트가 동부에서 서부까지, 그 먼길을 여행하며 만나는 친구들의 면면도 나름대로 따뜻한 사연을 담는다.
예전엔 사랑받았지만 철저하게 주인들에게 버려진 채, 현실의 차가운 바닥을 헤메며 살았던 고양이 미튼스. 애교스런 고양이의 애칭인 키튼스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벙어리 장갑이란 뜻의 미튼스라. 볼트에게 드라마는 허구의 일부임을 알려주지만, 벙어리 장갑처럼 속내의 상처를 꾹꾹 누르며 살았을 고양이 미튼스. 미튼스가 볼트를 만나 새롭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도 참 좋다.
투명구체 속에서 챗바퀴 돌듯 매일 S라인을 만들기 위해 달리기 하는 햄스터 라이노는, 볼트보다 더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다. 라이노를 가리켜 드라마에 몰입해,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로 파악하면 곤란하다. 그는 어차피 드라마가 현실이 아닌 것을 안다. 너무 멋진 대사를 했는데 여기에 쓰면 안될 듯. 볼트를 따라 머나먼 여행을 자처한 것은, 그 안에 있는 답답함을 대신 풀고 아픈 현실로 나오려는 인간의 목소리로 들릴 정도다.
여행 과정에서 볼트는 드디어 '개'가 된다. 평범한 개가 살아가야 할 방식을 배운다. 귀여운 모습으로 애교를 떠는 것도 배우고, 달리는 기차의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바람을 맞는 즐거움도 발견한다. 유기견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사회. 쉽게 싫증내고 유기하는 사회. 동물의 처지나 우리 내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다. 제조된 꿈을 허상이 아닌 진실로 믿게 하기 위해, 연기의 진실성을 획득하기 위해, 헐리우드가 동물에게 가하는 환상은 일종의 폭력이다. 경제성장이란 제조된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 허상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을 일종의 헐리우드 스튜디오로 만든 자들에게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한다.
볼트의 완벽한 연기는 주인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연기는 진실해야 한다. 연기를 해 본 사람은 안다. 내가 표현할 대상에 대한 진실함이 없이 연기는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헐리우드는 이런 진실함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개를 유기하고 버려둔 것이다. 내 안의 진실함을 얻기 위해, 외부의 현실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차가운 현실.
그 현실을 꿰뚫고 나온 개의 운명은 비루하고 버겁다. 이 땅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그렇다. 방송을 장악하고 비판적 지식인의 목소리를 투명한 구체에 가두고, 친 정부 발언만 살아남도록 설계된 사회. 그 현실의 껍질을 벗고 나오려면, 영웅은 죽음을 각오하거나, 상당한 상처를 감내해야 할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볼트는 차가운 거리의 바닥에서 자신과 연대할 수 있는 힘을 만나고,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같다.
MB 호의 강공 드라이브가 올해부터 본격적인 진수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가 알아주기 바란다. 그를 세상이란 바다에 띄운 것도 우리란 대하듯, 그 배를 뒤집어 전복할 수 있는 것, 그 힘을 가진 것도, 드넓은 바다인 것을 말이다. 주인 페니는 볼트와 함께 적과 싸우면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볼트의 짖기 신공을 빌린다. 그러나 대사 어디를 들어봐도. 짖기(bark) 라고 말하지 않는다. Speak라고 대신 말한다. 소통을 위해 나선 국민들의 목소리가 말하기(speak)가 아닌 짖기로 만든 건 바로 이 정권이다.
올 한해, 우리 안에 있는 볼트가 투명한 구체를 뚫고 세상으로 나오길 바란다. 짖기 보단 말하고, 소통하는 우리와 함께 하는 볼트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다행히 그 기대대로 잘 되고 있다. MB의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고 충성을 다하는 개의 숫자보다, 그 개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의 숫자가 수 천만배이기에. 제대로 된 개들의 이야기가 보고 싶다.
인간에겐 제대로 된 개가 필요하다. 진정한 충성의 의미를 알고, 진실함을 담보한 존재, 그 주인을 위해, 불타는 스튜디오를 뛰쳐 들어가고, 초고속 열차 위로 뛰어 내리는 진짜 개가 필요한 까닭이다. 주인의 상처를 핥고 그 옆에서 자신의 채온을 빌려줄 그런 개가 필요하다. 쓸모없이 광견이 되어버린 개는 필요없다.
<하하 미술관>이 반응이 좋습니다. 언론 서평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번주 토요일엔 월간 여성조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저번 <TOP Class>처럼 프로필 사진도 찍었어요. 이번에는 좀 잘 나왔으면 좋겠네요.
이제까지 <하하 미술관>이 소개된 서평들 모음입니다.
- 뉴시스 <그림에서 치유를 얻다>
- 한겨레신문 <1월 17일 교양 새책> 코너
- 조선일보 <한줄읽기-북스> 코너
- 문화일보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림의 힘> 서평코너
- 국민일보 <상처받은 영혼 다독이는 미술관-하하 미술관>
- 중앙일보 JOINS BOOK <영혼의 여백을 채워주는 미술관>
- 한국경제신문 <책꽂이> 서평코너
- 매일경제신문 <서평코너-Book>
- 연합뉴스 <생활문화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