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멋진하루'-배우 하정우를 생각함

패션 큐레이터 2008. 10. 4. 22:17

 

S#1-우리에게 주어진 '어느 불편한 하루'

 

영화 '멋진 하루'를 봤다. 나는 영화를 볼 때 항상 기존의 리뷰나 해설을 철저하게 배제한 체 영화를 읽는다. 다른 이들의 의견과 개인적 감상을 지나치게 읽고 나면 나 만의 평가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다. 미술 전시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갤러리에 갔을 때, 작가 노트나 평론가의 글이 실린 페이지를 일단은 패스 한채로 그림을 보라고 말해준다.

 

'멋진하루'란 제목에서 예전 미셀 파이퍼와 조지 클루니의 <어느 멋진 날>을 연상했었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제목이 가진 이중적인 면모를 알았지만 말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화면에 드러나는 이야기와 화면 바깥의 이야기로 나누어진다. 외화면과 내화면의 이야기는 한편의 피륙처럼 서로를 짜깁어가며 한편의 그림을 그린다.

 

이 영화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면, 외화면과 내화면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림을 짜맞출 수 있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한다. 두 주인공이 서울이란 공간 속을 유영하며 단서를 던져준다. 사실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정작 이 영화의 매력은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미세한 감정의 교류다. 섬세하고 절제된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연기에 대해선 항상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이 영화를 왜 보려 했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실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 정혜>란 영화가 있었다. 독립영화 느낌이 강하다 보니 일반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했지만, 매니아 그룹 사이에선, 그의 연출은 상당한 신선함을 인정받았다. 이후로도 두편의 영화를 더 봤고, 그의 팬이 되었지만, 이번 영화는 전작에서 느꼈던 감정의 깊이에서 오히려 부족함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부족분을 채우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배우 하정우다. 이 배우......정말 끌린다, 무섭다.....라는 느낌

이야기의 중반이 넘어서면 하정우란 존재가 참 귀한 배우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푹 빠진 모양이다.

 

 

경마장을 전전하며 얼마남지 않은 판돈을 걸어보는 남자.

1년전 헤어진 여자친구의 '돈 갚아'란 한 마디에 순순히 돈을 빌리려 다디는 남자.

이 여자와 남자 사이엔 어떤 일들이 지난 1년동안 벌어진 걸까.

눈밑까지 마스카라를 한 통에 다소 무서워보이는 눈매를 가지게 된 여자는

왜 이 남자를 떠올리며 찾아오게 된 걸까? 단순하게 350만원이란 돈 때문일까.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이의 여자. 병운(하정우)을 떠나

만나게 된 남자친구는 사업투자 실패로 큰 손해를 봤고 그의 결별 소식에

가볍게 동의한다. 80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은 죽어도 싫다며 아직까지 손을 놓고 있는

그녀에게 과거 빌려준 350만원이란 돈이 떠올랐고

 

 

이 남자 병운(하정우)은 이후 결혼을 했지만 두달만에 헤어졌다.

좋은 부모 만나 구김살 없이 살았는데, 하는 사업마다 운이 따르지 않았던지

빚까지 지고, 예전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모임에서 지인들이란

자들에게도 마뜩치 않은 잔소리나 듣고 있다.

과거에 꽤 간지나게 살았나 보다 하고 추측해본다.

 

이후의 이야기는 여자의 돈을 갚아주기 위해 급전을

빌리러 다니는 남자와 그를 도와 본의 아니게 '사정이 딱한' 처지를

세상에 노출시키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1년만에 채무자와 채권자가 되어

서울이란 공간을 떠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유랑자로서의 인간)를

그리는 로드 무비란 장르를 잘 알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로드무비의 속성

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만남과 연애는 길에서 시작되어 끝이 났고

또 다른 길에서 그들의 불편한 만남이 시작되었을 뿐일테니 말이다.

 

 

영화 속 전도연의 별자리가 물병자리란 사실이 끌렸다.

물론 뒤를 이어 나온 "물병자리들은 사람을 쉽게 버린다던데"란 대사에서 호흡이 흠칫

멈추었다. 신산한 겨울의 기운을 맞으며 태어난 2월생 물병자리의 특성일까?

내게도 동일한 경험이 있다. 사랑을 하면서 지게 될 마음의 짐이

무거웠다. 나를 떠나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목련꽃이 피던 때, 귀국을 앞두고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나는 말했지만, 마음이 먼저 변했던건 나였다.

영화 속 전도연이 연기한 희수와 나는 그런 점에서 물병자리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맞추며 살아온 셈이다. 그 대사 이후에 왜 그렇게 전도연이 좋아지던지......

 

 

영화는 철저하게 냉정한 시선을 견지하며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몰입했나 싶을 정도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병운에 대한 희수의 마음이

조금씩 해빙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배우는 연기공부를 하면서 신체훈련과 감정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 주어진 상황과 그 속에서 환경과 교감하는 배우의 신체가 만들어진다.

자신의 언어와 행동 하나하나에 내제된 의미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인데

템포와 리듬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연기, 그 중에서 하정우의 연기에 찬탄하는 건

영화 속에서 그가 표현해야 할 상황을 탄탄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텔레비전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것이 '첫타석의 중요성'이다.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으면 줄곧 이 역할로 간다. '실장님' 연기를 한번 잘 하면 이외의 캐릭터를

잘 안주는(?) 방송 연출의 특성도 물론 고려해야 겠지만, 유독 이런 특성이 강한 나라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해석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만난다는 건

참 귀한일이다. 생활 속 무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배우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즉흥성과 그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하기 때문이다. 단 이것이 무대로 옮겨질 때

특정 상황에서 내가 뭘 어떻게 했을 지 잘 기억해 내지 못하기에

일반인들이 무대 위 연기자가 되기 어렵다.

 

영화가 끝난 후, 조병운이란 배우가 하정우인지

하정우란 배우가 조병운이란 역할을 맡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했다.

참 좋은 배우고, 그런 배우를 만난 '멋진 하루'였다.

그의 연기 횡보에 행복 가득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