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박웅현 CP와 만났다. 그를 만난 건 2년 전 춘천의 호텔에서 열린 방송작가 협회 특강에서였다. 그는 지금껏 그가 만들었던 광고를 통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내가 인문학을 사유하는 렌즈로서 패션을 선택했듯, 그는 광고란 현대성이 만든 최고의 기제를 이용한다. 특강 후 점심을 먹고 20분간 그와 강변을 따라 산책했다. 그 짧은 데이트를 하는 동안, 나는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그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다.
그는 비단 광고를 잘 만드는 사람만은 아니다. 내가 그에게 빠진 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 바탕으로 삼는 문학적 감수성과 인문학의 깊음에 있다. 박웅현 선생님과 만난 이 날도, 최근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기로 한 따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는 박웅현 선생님의 따님을 만나러 직접 뉴욕에 간 적이 있다. 라틴어와 영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영재인 아이였다. 한때 미술사 전공을 두고 고민했었는데 최근 철학으로 전공을 조정한 것이다. 박웅현 선생님의 따님을 나는 콩이라고 불렀다. 컬럼비아 대학에 갔던 날 10월의 늦은 날, 때 아닌 대설이 내려, 캠퍼스가 온통 하얀색이었다.
콩이는 인문학으로 콩갈기란 책도 썼던 아이다. 부모가 가진 인문학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전해짐을 느낄 수 있는데, 한국에서 수능준비를 하던 아이들과 너무 달랐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한편으론 얼마나 부럽던지. 스스로를 콩가루집안이라며 웃겼던 아이는 이제 아버지의 인문학적 사유에 수많은 여행과 독서, 자신의 인디정신이 결합되어 새로운 생각을 잉태할 것이다. 내가 부러운 것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는 모두 다 생각을 잘 하고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안 그렇다.
인문학이 유행하면 무엇하는가? 그저 인스턴트 인문학이 판을 치고, 원전을 깔끔하게 컵라면 물에 불려 입속에 털어넣듯 편집해 나오는 책이 부지기수다. 한 권을 읽어도 치열함이 없고, 지식을 채워넣기에 급급하니 인문학이 줄 수 있는 장점을 오히려 못살린다. 이게 이 나라의 특징이다. 뭐 하나 유행하며 소비는 줄창 해대지만, 정작 본질은 놓치고 가이드북이나 찾고 있는 것. 패션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단면이 그렇다.
이런 사회 내부의 실루엣을 뚫고 박웅현 선생님이 보여준 이 땅의 광고는 참 아름답다. 오래된 광고지만 청바지와 넥타이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걸 광고로 말해준 그. 나는 이 광고를 유독 잊을 수 없는 것이 '패션의 민주화'를 딱 한 편의 광고로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맨날 이미 나온 결과물을 들고,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란 표현을 참 잘한다. '나도 알고 있었던 것이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고 말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직시하며 묻는다. 그런데 왜 안했어? 그들은 머뭇거린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타인의 결과물을 보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거라고 믿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도끼를 들고 유리창을 깨고 차가운 백설기같은 눈의 냉감각을 느끼는 이들에게 열린다. 내가 박웅현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정신의 도끼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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