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일상의 황홀

주말.....북카페에서

패션 큐레이터 2011. 9. 6. 03:25

 

 

호모 파베르의 슬픈 운명.....

 

지난 일요일,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항상 습관처럼 다니는, 제겐 일종의 아지트같은 곳 광화문의 시네큐브로 향합니다. 헤머링맨은 공공조각입니다. 너무 잘 아시는 작품이지요. 이곳을 지나다 보면 항상 눈에 띄니까요. 1979년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 조각으로 처음 전시된 후,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에 이어 세계 7번째 도시로 서울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입니다. 작년 스위스 바젤에 갔다가 저 망치인간을 봤죠.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조형 앞에서 가열찬 생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보다,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인간이 인간을 기능이란 관점에서 해석하고, 헤쳐모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확증하는 미술품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는 사라의 열쇠를 골랐습니다. 영화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네큐브에서 했던 시네토크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도 아직 올리지 않았네요. 아시아경제 기자님이 그날 시네토크에 왔었던지,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녹취해서 기사로 올려주셨더라구요. 솔직히 <사라의 열쇠>는 영화평을 쓰고 싶질 않습니다. 영화의 여운이 너무 강하고, 글을 쓰다가 문득 영화 속 사라처럼 같은 삶의 결말을 맞이할 것만 같아서 입니다. '감정이입'은 꼭 좋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그래도 영화 후, 끊임없이 되뇌는 말 한마디는 '살아야겠다' 입니다. 상처란 단어에 착목하고 살았습니다. 그 반대급부에 있는 치유란 단어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있지요. 미술치료를 그림으로 풀어냈던 <하하 미술관>도 결국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되집어 보면 그 치료의 주체이자 여격, 목적격은 결국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녁 6시 30분 영화를 골라놓고, 커피를 마시고 싶어 들어간 북 카페입니다. 모 신문사 옆에 새로 생긴 북 카페라고 하더군요. 강철 격자 무늬 사이로 돌들이 놓여져 있고, 그 사이로 피어나는 진주홍빛의 꽃잎파리들이 코발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아래, 속살을 풀어헤치고 있습니다.

 

 

북 카페 답게,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과 벽면에는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이 눈에 보입니다. 화분 위에 앉아서 고민에 빠진 미피도 눈에 보이네요. 단 북 카페를 지향하는 장소치곤, 음악선곡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편안하게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있던데, 여기는 3인이상이라 예약을 해야 하나 보더라구요.

 

 

일반 소설과 베스트셀러만 꽂아놓은 카페들은 좋아하질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독서습관이 매체와 연결된 마케팅 노력 때문인지 베스트셀러만 너무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의외로 편식효과가 커졌고, 그만큼 이성작용도 쏠림현상이 나타나지요. 책은 한 상 곱게 차려낸 밥상과 같습니다. 편식보단 다양하게 섭취해야죠. 중요한 건 다양성을 통일할 수 있는 그랜드 컨셉을 스스로 인생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미술과 디자인, 음악 이론 책들도 빼곡히 있어서 한참을 읽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미술사 교수 마틴 켐프가 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서재에서 꺼내 읽어봅니다. 참고로 이 카페의 커피향은 중간 정도입니다. 단 달콤한 케익은 의외로 괜찮습니다. 분과학문 사이에서 입으로는 통섭적 사고를 논하면서도 닫혀있는 이 땅의 대학에서, 마틴 캠프의 책은 앞으로의 세계에서 미술이 걸어야 할 길을 보여줍니다. 미술은 예술과 과학의 가교가 되어야 하고, 이 두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시각적 직관(visual intuition)'은 현대에서 그 어느 능력보다 필요한 힘이라는 점을 진득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누려온 세상이 호모 파베르, 도구적 인간을 육성해 온 세상이기에, 그 표준적 잣대인 스펙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를 마음껏 걸어다니며 내게 다른 목소리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이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업들이 인문학에 눈을 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 가을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출판계가 만들어낸 마케팅의 소산입니다. 책 매출은 가을에 뚝 떨어진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하지만 제 사무실 커피색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파삭한 가을 햇살과 싱그런 미풍에, 책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조합된다면 이 보다 가을풍경을 채우는 멋진 직소퍼즐도 없지 싶습니다. 북 카페에 자주 마실 다녀야 겠네요.

 

 

한 잔의 커피와 케익, 너무나 진부한 이 땅의 카페의 풍경이죠.

그러나 그 속에서 누리는 상념들의 값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어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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