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뉴욕을 수놓는 여자-인생은 바늘로 그린 그림 같은 것

패션 큐레이터 2011. 8. 21. 05:00

 

 

오늘은 뉴욕 여행 중 제게 큰 영향을 주신 한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여행은 알렉산더 맥퀸의

<Savage Beauty>전시기획에 관한 리서치 및 국내 전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콧대 높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구겐하임, 모마 같은 미술관들이 아시아에서 온 기획자를 쉽게 만나줄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 속 제 옆에 계신

정영양 박사님입니다. 뉴욕에서 48년째, 거주하시면서 자수를 비롯한

공예미술의 촉진을 위해 일하고 계신 분이지요.

 

 

정영양 선생님에 대한 글은 예전에 한번 올렸습니다.

지난 해 겨울, 숙명여대 정영양 자수 박물관에 들러, 관장님을

인터뷰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예전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듯 관장님은

단순하게 미술기획이나 전시만을 아울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복식, 그

중에서도 중국과 베트남, 몽골, 한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고대 복식들을

실제로 컬렉팅을 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 속에 들어가는

당대의 자수기술을 복원, 연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중에 <Silken Threads>란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저자 소개를 보면 자수장인이자 텍스타일 역사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처음 뵈었던 날도, 중국복식에 대해 실제 의상을 놓고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셔서, 저로서는 받아적는 일 밖엔 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 내의 복식사 연구가

다양한 나라의 상호 복식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고 그 진화과정을 추적할 만큼의

수준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70년대에 지금도 하지 못할, 수준의 연구를

해서 영어로 책을 내신 것이죠. 그래서인지 하버드 대학교

포그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관련 전시가 있을 때는

항상 박사님께 고증과 자문을 받더군요.

 

 

이렇게 딱 한번, 인터뷰를 통해 뵈었던 분이었는데

기적적으로 미술관 앞에서 뵐 줄이야. 인연의 끈이 닿았나 봅니다.

그 덕에 알렉산더 맥퀸 전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많이 여쭤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알렉산더 맥퀸 전에 나온 작품인데요.

놀랐던 것은, 옷에 사용된 국화문양의 자수들이 일본

자수라는 것과, 이것이 옷에 직접 자수를 둔 것이 아니라, 일본식

방장(벽에 사용하는 걸개)에 사용된 화려한 자수장식을 떼어다가 재활용 한 것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수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다 보니, 박사님을 통해 이번

알렉산더 맥퀸 전시에 자주 출연하는 자수 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가 있었지요. 저로서는 새로운 것을 쉽게 배울 수 있으니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겪고, 그 와중에 어머니에게

자수를 배우시고, 피란 중에 프랑스 자수를 배웠던 정영양 선생님은

이후 자수장인으로 꽤나 열심히 활약을 하셨습니다. 관련 자료들을 보니 놀랍습니다.

자수가 단순하게 여인의 일이란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 이미 국내에서 장인으로 대접을 받으셨지만

유학을 가셔서, 자수를 학문의 분야로 발전 시키신 것입니다. 규방공예에서, 한 시대와
당대를 읽는 기호로서의 자수를 연구하고 만드신 것이죠. 위의 작품은

68년도에 만드신 무궁화 드레스의 모습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분이 존경스러운 것이 연구를 할때의

태도입니다. 한국학자들은 대부분, 서양학자들이 써놓은 1차 자료와

사료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습니다. 적어도 서양복식사의 경우는 그렇지요.

비교 복식학을 위해, 다양한 나라를 직접 탐사하고, 밀착 취재하고 이도 모자라, 서로의

자수 기술을 전수하면서, 서로의 것을 배우며, 의미를 채워나갔습니다. 몽골과

바이칼, 베트남의 오지들을 찾아다니며, 패턴과 무늬의 상징성과

의미를 물었던 것이죠. 이분의 책이 나온지 오래지만

여전히 레퍼런스로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자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책 제목 하나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듯 합니다. '바늘로 그린 그림'

Painting with the needle 입니다. 바늘로 정교하게 한땀한땀을 질감과 양감까지

살려 그려내야 하는 수작업, 바로 자수의 세계입니다. 위에서 보시는 잉어도는 선생님의 작품이고

청와대에 납품되었다가, 현재는 정영양 자수 박물관에서 소장 중입니다. 여기서 잉어는 단결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시더군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주문을 받아 만든 작품입니다. 문제는 예전엔 '자수기술'이 실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기술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예술의 한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고요. 그렇다보니 현대 공예작가들과

섬유미술 작가들을 선정해 뉴욕에서 키워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거죠. 앞으로도 관련 자료들

을 모으고 컬렉팅하고, 작가들을 후원하는데 생을 바치시겠다고 합니다.

 

 

평생 모은 유물을 대학에 기증,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수 박물관을 만드셨듯, (박물관 내 소장 옷들의 가치가 400억에 육박합니다)

앞으로도 한국의 작가들을 후원하시면서 멋진 꿈을 꾸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관장님 인생이 너무 멋져서 아는 방송작가 분에게 관련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스토리

구조가 힘이 있고, 내용이 풍성해서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어떤가 하고요.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번

제천 영화제에서 만난 프로듀서들에게도 이야기를 해 봤는데 제게 시나리오를 쓰라고 하네요.

물론 저로서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정말 또 다른 우리시대의 역할모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생각해요.

제가 좋은 시나리오나, 방송 작가분을 만나고 싶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