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시쉬킨 <겨울 숲>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종종 떠오르는 겨울 영상이 있다. 4년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광막한 러시아 대륙의 속살을 관통했던 시간의 기억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여행을 했지만, 언어때문에 가장 많은 고생을 했다. 너무나 다른 정치/사회적 풍경 속에서 경험한 색다른 세계였다. 시베리아 열차에 몸을 맡긴 채 3일동안 진득하게 가야했던 바이칼 호수. 차창을 통해 보이는 러시아의 풍경은 정말이지 숲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앙상하게 가지만을 단정하게 내린 겨울 나목들. 내핍하는 나무들이 가지런히 정렬된 겨울 숲 풍경은 내 마음 한구석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이반 시쉬킨 <겨울 첫눈>캔버스에 유채, 국립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내 생에 단아한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었던 시절. 겨울 나목이 되어 이 땅의 문인들을 비롯, 한 시대의 독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셨던 박완서 선생님의 부고소식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그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언어가 가진 힘을 생각했다, 쉽지만 단정한 문체, 다공질의 현무암처럼 언어의 결을 조금씩 메우며, 내 경험과 그의 체험이 하나로 묶이는 '글 읽기의 체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많이 아쉽다. 그림 겨울 숲의 나목들을 볼 때마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떠오를 것 같다.
이반 시쉬킨 <삼나무 숲의 아침> 1878년
캔버스에 유채, 139 × 213 cm, 국립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내겐 글쓰기는 일종의 습관이다. 하루에 한편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대학시절부터 줄곧 지켜온 버릇이다. 글을 마치 전시장에 걸어놓는 그림처럼 쓰는 이들이 있다. 꼭 누군가가 봐주길 바라고 글 속 뼈대를 이루는 수사와 정신을 이해시키려 부단히 애를 쓰는 이들 말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배운 한 가지는 오히려 글을 쓰는 과정이 나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꼭꼭 숨기게끔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감정을 다 털어놓은 듯 보여도 사실 내면은 철저하게 감춘, 욕망을 숨긴 글을 자주 보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글로 만난 문인과 실제의 삶이 다른 문인이 많다는 건, 그런 점을 방증하지 않나 싶다. 어디 문학만 그렇겠나. 연극 배우 중에도 완장 채워놓으니 스스로 똠방각하를 연기한 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예술 그 자체가 삶의 진실을 표현해내기 위해선 주체인 예술가 부터 먼저, 진실을 토해내고 싸울 줄 알아야한다.
이반 시쉬킨 <참나무 숲에 내리는 비> 1891년 캔버스에 유채
왕년에 잘 나가던 블로거들이 왜 사라지고 있냐고 성토한다. 열정과 소통 노력의 부족을 이유로 내세운다. 미안하게도 이런 식의 빤한 답을 내는 태도 자체가 싫다. 하루아침에 블로그 공간에서 사라질 때,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만 있는걸까? 다음이란 공간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여서 예민한 이야기 하기가 어렵다고 자기 고백을 하는 게 정당해 보이지 않을까? 많은 시사 블로거들이 왜 사라졌나? 이 정권과 대립각을 세울수록 배제되는 과정을 겪어서란 걸 그들이 몰라서 그럴까?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하자. 쓰레기 시멘트 문제를 오랜동안 집요하게 거론해왔던 블로거가 있다. 사람들은 '불독저널리즘'이란 명칭까지 붙이며 블로그 저널리즘이 가진 '사회고발적 성격'에 대해 찬탄했다. 여전히 이분은 열심히 글을 생산하면서 산다. 소통도 잘 한다. 단 다음에서 못쓸뿐이다. 안쓰는게 아니라 못쓴다고 봐야한다. 다른 블로거들은 왜 말을 못할까. 끽해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따위 표현이나 늘어놓으며 뒤로 쑥 빠질 뿐이다. 참 비겁하다.
이반 시쉬킨 <호밀밭 풍경>
캔버스에 유채 107x187 cm, 1878년, 국립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반 시쉬킨이 살던 시절, 러시아는 전례없는 혁명의 시간이었다. 예술가들은 농촌으로 달려나갔다. 삶의 진실이 곧 예술이라고 믿었던 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그림의 주인공 이반 시쉬킨이다. 생 빼쩨르부르크 왕립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던 재원이었던 그는 당시 농촌과 숲의 풍경들을 그렸다. 하나같이 서정적으로 보이는 풍경이지만 자세히보면 바람에 넘어지고 부러진 앙상한 숲의 형상을 그려냄으로써, 당시 정신적 공황상태인 현실을 드러냈다. 미술사가들은 그를 사실주의 풍경화의 대가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그린 앙상한 겨울 숲 풍경은, 나목으로 벌거벗긴 채 버려진 당시 국민들의 정신성을 대변한다. 그러고 보니 남의 나라 사정 같지만도 않다. 하나같이 경제사정이 좋단다. 주가는 최고를 달리고 4대강이 되면 이 땅의 금수강산을 '아름다운 강물'이 관통할거라고 한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도 않고, 반증을 하면 비난하고 짓밟는다. 언론사에게 '종편'이란 달콤한 무기로 입에 재갈을 잘도 물린 탓이지만, 블로그스피어라고 뭐 다를 건 없어 보인다. 생활밀착형이란 미명하에 쏟아지는 글들 중엔, 어디에도 '시대의 이면'을 읽고자 하는 벼린 칼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칼은 상처받은 푸른 슬픔 위에서 스스로 운다. 글도 그렇게 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파워는 '시대와의 불화'를 끌어내는 힘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대의 풍경 속에 편입되어야 하고 일부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조화적 관계를 추구하길 꿈꾸지 않는 이가 있을까? 불화는 조화의 반대어가 아니라,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빛과 어둠처럼 항상 함께 존재해야만 세상은 탄력을 얻는다. 그만큼의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일거다. 세상을 향해 비판하는 이들을 가리켜, '염세적이고 회의적'이란 수사를 붙이는 이들이여. 너희들은 저 찬란한 겨울 숲을 걷지 말라. 숲의 섭생은 이쁜 나무만 자라지 않는다. 나무의 그늘아래 자라나는 균사를 비롯,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소우주로서 존재한다. 두려움 속에 입을 닫은 너. 함께 눈을 맞으며 시대의 도정에 설 생각을 버려라. 친한 블로거 분이 그러셨다. 나를 가리켜 쓴소리도 잘 써서 점수도 잘 까먹는 친구라고. 작년 한해 메인화면에서 뜸하던 내 글이 요즘 부쩍 자주 오른다. 내게 다시 순번이 돌아온걸까? 예술을 통해 삶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치기 때문인지, 이런 호의가 마냥 기쁘지만도 않다. 내가 생각하는 파워는
'유리창에 김이 서려있을때, 자연스레 닦고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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