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청빛 하늘이 고운 하루였습니다. 피부를 투과하는 하오의 햇살은 여전히 따갑습니다만
습기대신 가을의 헛헛함을 담은 대기는 파삭파삭 몸이 습기를 식힙니다. 늦게서야 덕수궁 미술관에 들러
아시아 리얼리즘 전시를 봤습니다. 매달 세종문화회관의 예술매거진 <문화공간>에서 '김홍기의 갤러리 가는 길'을
통해 전시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제서야 이 전시에 대해 논평할 기회를 갖게 되는군요.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 전은 국립미술관이
나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한 전시였습니다. 지금껏 서양근대미술, 그것도 인상주의와 그 이후의 유파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블록버스터 전시,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전시를 올리는데만 급급했던 우리의 전시사정이었습니다.
지나친 성과주의가 빚어낸 경쟁의식은 국립 미술관의 존립과 그 근거의 이유까지 허물어뜨렸죠.
그런 점에서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전의 의의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다카하시 유이치, 일본, 오이란(花魁), 1872년, 캔버스에 유채, 77 x 55cm, 도쿄예술대학미술관 소장
흔히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법 정도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사실 특정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화파의 이름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미를 추구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 중 비중있는 한 부분을 차지하는 관점이자 입장입니다.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말 속에는, 과학적인 이란 뜻과 동시에 미술이 잉태된 시점의 문화, 역사적 조건까지 정교하게
그려내고 표현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니까요. 특히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 전시에 참여한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하나같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침탈을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의 주인공
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그림 속엔 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요.
물론 전쟁과 제국주의, 문화적 침략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자신들의 전통적 문화유산을 지키고, 기존 전통미술의 기법과 관점을 서구의
화법에 더해, 새로운 조형언어로 키워내고자 하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다카하시 유이치가 그린 일본 유곽의 최고계층을 이룬 오이란의 초상을 봐도 이런 흔적을 느낄 수
있죠. 오이란은 여러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 비녀를 꽂았습니다. 이 오이란의 헤어 스타일을 일본 복식사에선
효고가미라고 합니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머리양식인데요. 풍성하게 머리를 올려 올림머리 형태를 하고
빗이나 리본, 비녀를 꽂아 장식했습니다. 이 헤어스타일의 특징은 바로 옆부분 머리에 풀을 먹여 마치 날개처럼
퍼지도록 한 점입니다. 여기에 앞 이마의 가운데 머리털 부분을 아래로 늘여뜨여 과부의 봉우리 형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걸 흔히 Widow's Peak라고 서양사람들이 닉네임을 붙여놓았죠.
판깨안, 베트남, 1972년 하노이 크리스마스 폭격, 1985년, 보드에 옻칠, 95 x 175cm, 위트니스 컬렉션
저는 이 그림이 참 잊혀지질 않더군요. 민족주의자였던 화가 판깨안은 1972년
하노이에 쏟아진 크리스마스 폭격 후 현장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12월 18일부터 30일 까지
무려장장 4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모든 삶의 지탱거리가 파괴되고 무너진 도시의 풍경이 아련합니다.
페르난도 아모르솔로, 필리핀, 모내기, 1924년, 캔버스에 유채, 69 x 99cm, 개인소장
탈식민주의란 이념 혹은 철학에 대해 들어보신적이 있을겁니다.
식민주의란 말 그대로 식민지 상황이 문화적으로 유전되는 상황을 의미하지요
비록 군사력에 의한 지배는 끝났지만, 여전히 문화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깁니다.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던 서구 열강을 스승삼아, 그들이 규정한데로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정신의 습관을 우리는 식민주의라 말합니다. 이 습관은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페르난도 아모르솔로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모내기'는 서구가 상상하는 농촌의
이상향을 드러내는 모습일 뿐, 실제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트루부스 수다르소노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 1960년, 캔버스에 유채, 싱가포르 국가유산위원회 소장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 전의 포스터로 사용된 수다르소노의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입니다.
가장 인상깊은 그림이었고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전통의상과 머리장식을 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죠.
지금 여인은 백색의 케바야라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뒤에서 하나씩
머리 매듭을 만들며 콘데라 불리는 머리핀을 꽂을 자리를 만들고 있군요. 그림 속 병아리는 이제 막 부화해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붙였습니다. 결혼식을 위해 머리 단장을 하는 그녀의 삶도 이제 곧 저 결혼식
후에 새롭게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출발을 위한 도정의 선 위에 서게 되겠죠.
위에 보시는 사진이 바로 그림 속 여인이 입고 있던 케바야 입니다.
올이 극도로 고운 실크소재로 만드는데 자수를 두어 그 화려함을 뽐냅니다. 싱가폴
에어라인의 스튜어디스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 바로 이 케바야에서 영감을 얻어 변형시켜 만든
유니폼이죠. 최근엔 기존의 백색에 더해 다양하고 유혹적인 컬러를 더해 결혼식 의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콘데라 불리는 머리 장식이에요. 우리 조선시대의 떨잠과 비슷하지요.
추아미아티, 싱가포르, 말레이 대서사시, 1955년, 캔버스에 유채, 112 x 153cm, 싱가포르국가유산위원회 소장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대 서사시로 읊어내는 남자. 아마도 그는 중국인들을 규합해
이제 곧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말레이지아의 독립을 위해 싸울테세입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훈화 교육중이군요.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드디어 '민족'이란 개념에 눈을 뜨고 이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갑니다.
얼마나 스승의 시 낭독에 빠져 있으면 어깨에 올라앉은 파리에도 아랑곳 하지않을까요.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 전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동남 아시아 국가들의
'명작들을 실컷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모습을 보고, 역사를 통해
미술의 힘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려왔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 같네요. 꼭 들러보세요.
자료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 분원
글 : 김홍기(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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