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텔에 가는 이유
2007년 겨울, 마이애미 해변의 카탈리나 호텔에서 열린 브리지 아트페어(Bridge Art Fair)를 보러 갔습니다. 호텔 룸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갤러리나 국·공립 미술관, 혹은 백색의 입방체 벽면으로 둘러싸인 기존 전시장 풍경에 익숙했던 제겐 색다른 느낌이었죠. 유난히 습하고 힘겨운 올 여름. 무더운 탓에 전시장을 들르는 일 자체가 힘겹습니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여름 빛에 말할 기운도 잃었습니다. 언어의 수맥이 턱턱 막히는 탓에 글 쓰는 일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이런 날은 도시 속 1인치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습니다. 바로 호텔입니다. 호텔에서 미술전시를 한다? 유럽에서는 드라이브 인 모텔이나 작은 호텔을 빌려 전시회를 진행하는 일은 새로운 형태가 아니랍니다. 일본의 아트 오사카(Art Osaka)와 타이완의 영 타이페이(Young Taipei)도 호텔을 이용한 아트페어로 성장했지요. 호텔이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위한 아웃렛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미술품 컬렉터로 살아온 제겐 호텔 아트페어는 꽤 흥미로운 행사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갤러리들은 고객들에게 ‘미술품을 사서 집에 가져가 직접 걸어본 후 마음에 들면 그때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림을 살 때는 갤러리 내부의 인테리어나 현장에서의 프레젠테이션에 소비자가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객을 배려한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죠. 침대와 콘솔(작은 장식용 탁자), 소파와 책상들이 놓인 호텔 룸은 실제 집의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텔 아트페어는 그림을 구입해 자기집 벽에 걸어놓을 경우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이 되는 셈입니다. 그림을 사는 일은 옷을 사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고급 소재와 재단기술을 이용해 만들었을지라도 신체란 3차원의 형상 위에 덧입혀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그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은 집이란 공간 위에 방점을 찍으며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조형합니다. 많은 이들은 그림의 가격이 구매 결정에 걸림돌이 된다고 말합니다만, 약간의 발 품만 팔면 명품 잇백에 뒤지지 않는 6천 원짜리 빈티지 가방을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호텔 나라의 엘리스
70여 개의 갤러리가 한 자리에 모였기에, 한 자리에서 시각의 성찬을 즐길 수 있는 호텔 아트 페어 속으로 이제 들어갑니다. 우선 일본작가 히로시 고바야시의 작품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자신의 분신인양 갖고 놀던 테디베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립니다. 푸른 빛깔의 곰 인형은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현실의 고단한 삶을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을 안겨주지요. 눈길을 끄는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바로 동양화가 성영록입니다. 성영록의 화면에 등장하는 매화들은 서정적이며 애잔합니다. 대부분 강가 언저리에 피어있거나, 푸르거나 때로는 붉게 물들여진 강물을 배경으로 하고 가냘프게 매달린 모습이죠.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강물 위에 피어난 매화꽃은 하얀색이거나 금빛입니다. 그에게 있어 매화는 정신의 형상을 드러내는 매개지요. 어디 이뿐인가요?
청바지를 찢어 풍경화를 그리는 작가 최소영의 작품은 항상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데님이란 거친 질감의 직물. 이제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버린 청바지를 잘라 조각 맞춤 하듯 모자이크 작업을 했습니다. 이번엔 런던의 밤 거리 입니다. 상념에 가득한 런던의 거리, 고달픔이 퍼석퍼석 흩어지는 밤의 기운이 자본주의의 총아라 불리는 금융거리의 중심에도 솟아나나 보네요. 작가가 청바지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입다 버린 청바지에 배어나는 인간의 향, 이곳에는 개인의 취향과 태도, 습관, 스타일 모두가 담겨있으니까요. 그녀에게 청바지는 형상기억합금처럼, 도시를 거닐었던 모든 이들의 기억과 체험을 여린 주름 속에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호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림들은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는 그림으로 묘사한 패션에 항상 시선을 모으는 편인데요. 신인작가 이국현이 그린 여인들의 모습엔 짙은 명품 선글라스와 모피를 입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전체적으로 섬뜩한 분위기의 다양한 fancy 원피스를 입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 인물들은 뭘 표현하고 있을까요? 이처럼 작가는 성적 환타지의 표출을 통해 획일화되고 기성화되어 가는 사회의 관념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그림입니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 혹은 ‘그림 자키’로 널리 알려진 화가 한젬마의 특별전 <한젬마의 방>도 좋습니다. 1995년부터 일관성 있게 못으로 표현한 사람의 형상을 통해, 관계로 묶인 사회의 단면을 사유해 온 그녀는 이번에는 카펫과 쿠션, 실내등과 같은 일상소품과 하나를 이룬 인형작업을 선보입니다. 미술과 일상이 이음매 없이 연결된 세상임을 다시 확인시켜 줄 듯하네요.
이번 아트페어는 한국과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등의 주요 화랑 72곳이 모여 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을 선보입니다. 90여 개의 객실이 전시공간으로 사용되며 개별 룸마다 갤러리의 특성을 담아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호텔이라는 숙소가 휴식을 넘어 문화공간으로 확장되는 시간입니다. 사적 친밀감이 배어나도록 배열된 그림의 숲을 재미 삼아 헤매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일본 현대미술을 한 자리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기에, 페어를 만나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소중했던 이유입니다. 작가 히로시 스기모토가 석판화로 제작한 <빛의 교회> 앞에서 한 동안 서 있었습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제작해 유명세를 치른 건축물을 판화로 담아내 환상과 유려함을 더했습니다. 고레히코 히노가 그린 아이들 그림도 좋습니다.
작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했다가 만났던 작가의 그림은 하나같이 유년의 초상처럼, 우리 안에 있는 당혹스런 감각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웃음과 더불어 성장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풍경들이 아이의 몸에 하나씩 새겨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예전 블로그에 <그림쇼핑>이란 폴더를 만들어 그림들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화가 지망생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제 폴더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예술작품에 쇼핑이란 용어를 붙인다고 해서 예술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 저는 반대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한 장의 그림도 화가를 통해 그려진 ‘그리움의 세계’일 것이고, 화가는 이 그림을 판매해야만 ‘그리움의 세계’를 확장하며 살아갈 경제적 급부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쇼핑(Shopping)이란 단어를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코드로만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쇼핑이란 개념이 탄생했던 19세기 초 백화점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중산계층’의 개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쇼핑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자아를 조형하는 과정이 된 것이죠. 이제 우리가 그림을 보고 사는 일도 이런 지축의 변화를 겪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6만원의 작은 소품에서 수억에 이르는 그림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한 장의 작품을 사야 합니다. 가족들과 오랜 시간 그림 앞에 모여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여름날의 선물 하나 준비해 볼 일입니다.
'Art & Healing > 내 영혼의 갤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 대신 인형과 살고 싶은 너에게 (0) | 2010.09.08 |
---|---|
정직하게 살아왔느냐?-매화 앞에서의 사유 (0) | 2010.09.08 |
꿈은 이루어진다-우리 안의 상처를 별로 만들때가지 (0) | 2010.06.27 |
그리스의 신과 인간 展-인간에게 신의 길을 묻다 (0) | 2010.06.15 |
천안함 희생장병을 위한 그림-아름다운 폭풍이 분다 (0) | 201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