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패션의 제국을 세운 남자
이번 패션 큐레이터의 서재엔 또 다른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25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도록이다. 나는 유독 이 디오르가 참 좋다. 1905년 프랑스 그랑빌에서 태어나 57년 안타깝게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그가 패션계에 남긴 족적은 하나하나 지적해가며 글로 쓰자면 수백회를 써도 부족하다.
프랑스 패션의 근간을 이루는 Chic란 어떤 면에서 보면 Dior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적 우아미를 말하는 이 쉬크란 개념을 너무나 남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커피북으로 놓고 보기엔 도록 속 이미지 하나하나가 눈이 부시다.
내가 알기로 그의 가문은 비료공장을 운영했다. 원래 가족들은 그가 외교관이 되고 싶어했지만 본인은 너무나 완강하게 패션에 종사하길 꿈꾸었다. 아르바이트를 위해 패션 스케치를 한 장당 10센트씩 받고 팔았던 사연은 꽤 유명하다.
이번 디오르의 기념도록은 그의 생애 주요한 디자인과 모티브, 관련을 맺은 예술과의 선명한 이해 속에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의 1930년대 디자인은 최근 2010년까지 그 기조가 바뀌지 않고 있으며, 오트 쿠튀르란 화려한 소우주를 찬미하고 지켜낸 장인의 손길은 여전하다.
책을 들고 가다가 휘청거릴 만큼, 책이 무겁다. 그는 무엇보다 직물 선택에 뛰어난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였다고 알려져있다. 모델들의 몸선을 한번에 파악하고 일일이 천을 덧대어가며 입체재단으로 아름다운 선을 구현해냈다.
1928년 그가 열었던 작은 갤러리는 피카소와 같은 다양한 근대화가들의 작품을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이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은 실험성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에 의해서일거라 판단된다.
부모의 재정적인 지원이 끊기자 운영하던 갤러리를 포기하고 의상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디자이너 피에르 발맹과 함께 경쟁하며 1920-49년까지 파리 패션의 황금기를 이끈다. 이번 도록이 멋진 건 그 시절 최고의 작품들을 완벽한 사진 상태로 재현해냈다.
그는 항상 여인을 꽃으로 표현했다. 1947년 그의 첫번째 컬렉션 이름도 꽃으로 만든 화관을 뜻하는 Corolla로 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의 뉴룩은 전쟁으로 인해 물자의 곤핍이 일상이 되었던, 과거의 시간을 한 방에 돌려버린 사건이었다.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였던 카멜 스노우가 명명한 이 '뉴룩'은 풍성하면서도 육감적으로 여성의 몸선을 살려낸 옷들이다. 그는 형태와 실루엣을 창조하는 데 최고의 장인이었고, 그의 손끝에선 철저하게 한땀 한땀 스티치로 재구성되는 여성의 이상미가 녹아있었다.
이번 디오르 도록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일본의 역사학자 노에 게이치가 쓴 <이야기의 철학>을 읽고 있는데 읽다보니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경험은 한편으로는 신체적인 습관이나 의식으로 전승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로 축적되어 전승된다. 인간이 이야기 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행위를 통해 멈춰 세우고 축적된 공동체의 기억의 두께 속에서 자기확인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동물임을 의미한다"
길지만 인용한 것은 복식사를 연구하면서 과연 옷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를 알아보기 위한 자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학생들과 함께 보았던 패션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에서 디렉터였던 그레이스 코딩턴이 한 말을 떠올려봤다.
결국 "패션은 스토리다, 한 여인에 대한 환상을 빚어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진부한 사실들의 종합인 역사를 공부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과거의 경험들이 축적된 화석과 같은 것이고, 그 화석의 생김새를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결국 해석학적 경험이란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들의 상상력에 있다는 점이다. 복식사 과목이 천대를 받는단다. 요즘 의상학과나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복식사는 그저 교양과목 정도로 통어되는 이 나라. 그렇게 된 데는 학자들에게도 일정부문 책임이 있다.
옷에 담긴 구전사적인 특성의 이야기들을 살려내지 못한 탓이다. 최근 그리스 로마 복식에 관련된 논문집을 사모아 읽고 있었는데, 결국 느끼는 건 하나다. 과거는 현재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 언제든 새롭게 구축될 수 있는 이야기의 원천이란 걸. 디오르의 너무나 무겁고 두터운 도록을 읽으면서 배우게 된 것도 30-40년대를 어떻게 재구성할수 있을까의 문제다. 과거는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다. 현재의 틀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꽃의 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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