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패션과 미술, 서로의 속살을 더듬다
올해 여름 산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바로 <Louis Vuitton : Art, Fashion and Architecture>란 책입니다. 대부분 패션 브랜드에서 나온 책들은 광고 이미지들로 가득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런 기대를 한 방에 보내(?) 버립니다.
최근 한국사회도 드디어 패션과 문화의 결합이란 화두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내년에 '패션문화 페스티벌'을 열 예정인데요. 단순하게 하이패션의 개념을 넘어, 우리안에 있는 전통성, 현대의 역동성, 패션에 용해된 문화의 무늬를 어떻게 디자인에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2주전 문화체육관광부에 이 페스티벌의 '자문위원'으로 다녀왔습니다. 행사 전반에 걸쳐 컨설팅도 하고, 제 나름대로의 생각도 표명하고 왔습니다. 항상 이런 모임과 학술토론, 혹은 포럼에 가서 느끼는 것은, 이 땅의 의상학자들과 큐레이터, 나머지 문화기획자들의 시선이 생각보다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을 탓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는 지독하리만치 강력한 학문별 위계와 분과주의가 강했던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고전에 손대면 '왜 내 밥그릇에 손을 대느댜?'는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학계는 이제는 아니라고 발뺌합니다만, 미안하게도 대학의 현실은 여전히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예전 제가 군대에 있던 94년초에 '탈춤'에 관한 이론서가 한번 나온적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조동일 교수님이 쓴 탈춤책이 가장 저명했죠. 그런데 새로나온 이론서를 쓴 학자는 영문학 이론을 한 분이었죠. 난리가 났습니다. 서양의 이론에 짜맞춘 현실성 없는 생각이란 말이 나돌았죠.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야 열띤 논쟁이 벌어질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제 생각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구나' 하면 될걸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루이비통 매장 샹젤리제 (2005): 여성구두 섹션.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피터 마리노의 실내 디자인
스테인레스 강철을 이용한 모노그램막
패션과 미술의 결합, 다양한 상상력의 교류, 예술과 문화의 통섭이라는 21세기 형 화두가 등장한 후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최근에 보니 디지털 대학교에 <패션미술과>가 생겼더군요. 뭔가 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과 제목은 그럴듯 하지만 사실 안에 들어가보니 패션분과 따로, 기획분과 따로, 회화분과 따로 전공을 하게 되어있어요. 저는 처음 패션 미술과라고 하길래, 패션과 미술의 협업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커리큘럼으로 짠 줄 알았는데, 아주 원시적이었습니다.
루이비통 사에서 나온 스테븐 백, 사진작가 제이미 차드가 촬영
플라스틱 파우더 위에 남겨진 가방의 인상을 찍었다.
F/W 2006-07. 30.5 x 40 cm, 루이비통 소장
그만큼 여전히 한국사회는 학문간 위계의 벽에 갖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왜 자꾸 남들과 나누면 내 그릇이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어떤 점에서 보면 학자들, 학교 간 태도는 한국사회의 미숙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기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놓여있듯, 학문과 학문 사이에도 섬이 놓여있습니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지 않으면, 타 장르의 속살을 만질수 없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가, 인문학적 성찰이 부족하다보니, 남의 말이랄까, 흔히 외국에서 건너온 것에 대해 귀가 얇습니다. 유행이란 것이 비단 패션의 문제는 아니지요. 그건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에도 이런 성향이 강합니다. 뭐 하나 뜨면, 유행하면 모든 학자가 그 사람의 책을 읽고, 그 개념을 갖고 포럼을 열고, 사업가는 직원을 상대로, 외국의 선진경영기법이라며 배우자 뭐하자 이러고 있습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패션과 미술의 연금술이란 화두는, 한국사회에서 넘어야 할 벽이 여전히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패션문화 페스티벌 또한 그렇겠지요. 하나같이 패션계 내부에서 싸움이 일지 않도록 양 패션 그룹에서 두 사람씩을 뽑아서 멘토로 내세우더군요. 어찌나 웃기던지.
덴마크의 천재 가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슨의 가구철학을
모방한 시리즈 7사의 그네 작품입니다. 1만 8천불에 경매에서 팔렸고 그 수익금 전액은
덴마크의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었습니다.
<루이 비통: 미술과 패션, 그리고 건축>은 럭셔리 브랜드의 역사에서, 최초로 루이비통과 미술계, 건축, 디자인, 사진과 패션 등 다양한 층위의 여러 디자이너들과의 공모관계, 창의적 상상력의 교류를 세세하게 선택해 밝힌 책입니다. 풍성한 일러스트와 작품사진으로 가득한 이 책은 동시대 패션과 미술의 만남에 대해, 미술비평가와 복식사가, 이외에도 사회학자 등의 다양한 해석을 덧붙여 비평적 관점을 나눌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패션분과의 전문 출판사인 이탈리아의 리졸리사가 편찬했습니다.
조각가 실비아 플뢰리의 루이비통 가방 <모든걸 담다>
1854년 창사이래로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였던 루이비통은 엘레강스의 상징이었습니다. 여행의 기술을 발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루이 비통과 그의 승계자들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와 발맞추며, 뛰어난 엔지니어, 장식미술가, 화가, 사진가, 디자이너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표현의 양식에 매료된 채, 아트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의 지도라래, 오늘도 패션과 미술의 결합, 그 유혹의 연금술을 펼칩니다. 구두와 시계, 보석과 기성복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루이비통의 상징성과 제품의 폭도 넓어졌죠. 실비아 플뢰리의 2000년작, 이 조각은 이후 루이비통 시티백 시리즈의 거울 로고의 기반이 됩니다.
사진작가 이네스 반 렘스위드의 작품이죠. 비누 마타딘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펑크 디자이너 비비엔 웨스트우드가 1996년 루이비통 모노그램 100주년 기념을 위해 디자인한 백을 들고 있습니다.
2008년에 나온 몰튼 백(Molten Bag)입니다. 세계적인 이탈리아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파브리지오 플레시의 작품입니다. 초경박 TFT-LCD 스크린을 에피 가죽에 씌워 만들었습니다. 에피 가죽이란 소가죽을 오랜동안 말려서 결이 생기는 질감을 얻은 가죽입니다. 루이비통의 여행용 가방 초기 모델 부터, 여행용 가방의 내구성을 위해 루이비통이 이용한 방식이죠. 이 가방은 전 세계적으로 88개만 한정해서 만들었습니다.
루이비통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세자르나 솔 르윗과 같은 현대미술의 거장과 작업을 하며 본격적인 시작됩니다. 패션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장인정신에 덧입혀진 예술의 영향을 선보이면서, 그들의 투툼한 상상력의 질감은 일종의 전통이 되고 새로운 차원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죠. 1997년 마크 제이콥스가 루비비통 하우스에 들어오면서, 현대미술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초빙, 심지어는 루이비통의 로고 디자인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래없는 수준의 예술과 패션의 인터페이스가 확장된 셈입니다. 루이비통과 파트너십을 맺었던 예술가들 중에는 고인이 된 스테픈 스프라우스, 일본의 팝 아티스트 타카시 무라카미, 사진작가 리처드 프린스 등 셀수 없이 많죠.
다카시 무라카미의 <영역의 세계>
보드위에 장착한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채색,
350 x 350 cm 마리안 뵈스키 갤러리, 뉴욕
마크 제이콥스의 아트 디렉터로서의 역량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그는 예술가 각각의 개성 넘치는 형태와 시각적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빌려와 차용하고 마음껏 사용합니다. 단순한 베끼기의 차원을 넘어 점포 디자인과 매장 내 설치미술, 샹젤리제에 있는 루이비통 매장 꼭대기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현대미술작품을 구매하고 컬렉팅하는 기업의 노력도 가상합니다.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시인인 미스 틱의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은 <루이비통 오마주>인데요. 작품 속 인물이 바로 루이 비통의 창립자랍니다. 그녀는 파리에서 자랐지만 뉴욕의 그라피티(낙서예술)에 눈을 뜨면서 본인의 스텐실 판화기법을 이용한 인물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이외에도 건축가들과의 작업도 현란합니다. 준 아오키, 쿠미코 이누이, 피터 마리노등 쟁쟁한 건축가들의 사유가 루이비통 매장 디자인에 녹아 있죠. 책을 보는 시종일관, 눈이 행복한 책입니다.
패션과 미술의 결합, 그 양태와 수준도 시간에 따라 진화합니다. 꼭 책에 나온 것들이 선진의 사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보다 먼저 고민했던 입장과 차이,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창의력의 수준을 한번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올렸습니다. 4시간에 걸쳐서 고생해서 글 썼습니다. 이제 산책하러 나가야 겠습니다.
<Louis Vuitton : Art, Fashion and Architecture>의 출간 마케팅을 위해 신예 미디어 아티스트인 카미유 쉐레에게 북 디자인의 미디어 작품을 의탁했습니다.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미디어와 패션, 책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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