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당신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나요?
피렌체와 베니스를 이잡듯 돌며 패션사진과 가면을 찍었던 게 언제였나 싶다. 복식 박물관에서 본 수많은 역사의상을 하나하나 공부하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던 그때.
옷의 디테일을 읽었고, 소재와 옷에 담긴 사연을 생각해 내며 함께 여행한 사진 전공하는 후배에게 설명해 주곤 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란 책이 나오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곳곳에 베어있다. 패션 소품 중 가면에 관심이 많다보니 베니스를 가는 건 당연지사였고, (세계 풍속사에선 항상 베니스를 가면의 도시로 불렀고, 실제로 17세기부터 시작된 가면 제작기술은 놀랍다. 도시 곳곳에 가면 공방들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가면을 판매한다.
예전 무역상인들의 주요한 항구로서 역할을 했던 베니스는 해상공국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도맡았었다. 콘스탄티노플까지 이어지는 해상로의 중심을 차지한 베니스엔 다양한 상인들과 세계의 장사꾼들이 운집하는 장소였다.
오죽하면 마르코 폴로가 베니스는 모든 기독교 국가의 황금이 흘러가는 곳이라고 찬탄했을까. 베니스는 그만큼 경제적으로 축복받은 도시였고, 풍성한 물자와 교류로 최상층의 삶을 누리는 이들로 가득했다.
베니스에선 매년 3월이 되면 온 거리엔 가면을 쓴 사람들로 가득찬다. 가면축제가 열리는데, 나 조차도 이때 가보지 못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보고 싶은데, 경쟁이 보통 치열하지 않다. 보통 1년 전에 호텔을 예약하지 않으면 (비행기편은 물론이고) 자리를 얻지 못한다.
책에서 밝혔듯, 이 당시 귀족 여성들은 외설적인 연극을 보러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야 했고, 이를 위해 가면을 썼다. 문제는 이 가면은 모든 베니스의 시민들에게 퍼져 모든 이들이 가면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많은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만큼 베니스란 도시가 작았기 때문에 입소문이 빠른 도시란 점과, 그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들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고, 다른 이들이 몰랐으면 하는 부분들을 갖기 위해, 가면을 쓴 것이다.
베니스를 걷다보면 정말 많은 가면 가게들과 공방을 발견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가면들이 있다. 각 가면들의 캐릭터를 설명해 놓은 책이 있었는데
그것 하나만 설명할려고 해도 수십차례의 블로그를 써야 한다.
가면은 베니스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을 동등선상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능을 했다.
가면을 쓴 이상 노예나 하인일지라도, 신사로 오인될수도 있고, 물론 그 역의 상황도 가능하고 말이다.
도시 내의 경찰관이나 스파이들은 거리의 시민들에게 정체를 묻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니
참 재미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가면을 쓴 이상, 자신의 목소리를 낼수 있었기에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자신의 정체성과 목소리를 담아 표현할수 있었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는 점점 더 퇴폐적으로 변해갔다.
베니스에 가면 세계적인 바람둥이로 알려진 카사노바의 에로스 박물관이 있다.
그는 생선부레를 콘돔으로 사용하여 여성을 안심시키는 등의 (당시로서는)뛰어난 여심읽기의
천재였지 싶다. 이외에도 베니스는 매춘의 도시였고, 이 모든 것이 가면을 통해 가능했다.
이철희_Gold persona-LV_브론즈에 asc 코팅_70×50×50cm_2008
가면은 항상 그것을 착용하는 자의 정체를 감추고
음험한 욕망을 언제든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가.
작가 이철희의 작품 연작 <황금의 페르조나>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한다.
로봇을 떠올리게 하는 신체에 텔레비전 모니터가 부착된 머리
조각가 이철희가 자주 사용하는 소재이자, 여기엔 메세지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철희_Gold persona-Pink coin_브론즈에 asc 코팅_75×50×30cm_2008
영어의 사람을 의미하는 Person은 Persona 에서 나온 것이다.
페르조나는 가면이란 뜻이다. 우리내 삶을 살아가면서 써야할 가면의 종류와
이중의 생을 살도록 프로그램된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일 거다.
이철희_Gold persona-Big breast_브론즈에 asc 코팅_80×50×50cm_2008
한편의 퍼즐처럼 맞추어진 존재
이철희에게 인간은 그렇게 사회 속에서 다양한 방송매체와
미디어를 통해서 재구성되고 조합되는 존재라고 보여진듯 하다.
물질숭배를 표현하기 위해 황금을 사용하고 여성의 신체를 통해 성적 욕망을 은밀하게
드러내는 일은 베니스에서 본 다양한 가면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이철희_Gold persona-Conversation YP_브론즈에 금, asc 코팅_40×35×24cm_2008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를 하고 밀어를 나눌때 조차도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조건화된 우리 시대의
사랑과 결혼에는 이런 가면이 꽤나 필요할듯 보인다.
이철희_Gold persona-토르소_브론즈에 금, asc 코팅_70×40×35cm_2008
사실 페르조나(개성)을 잘 관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 자신의 면모를 멋지게 드러내고, 감추는 일은 패션의 주요한 과제다.
오늘 한국 최고의 퍼스널 브랜딩 전문가를 만나 오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면을 잘 썼어야 했는데, 그저 옷 이야기, 디자이너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차리는 통에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리며, 대화를 하고 말았다. 아마도 크게 실망하지 않으셨을까 걱정이 된다.
이철희_Gold persona-Hepburn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8
작가는 어린시절 자신의 영웅이 되었던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에게
월계관처럼 황금 가면을 씌워주고 싶었다고 한다.
오드리햅번에겐 어떤 빛깔의 가면이 어울릴까.
이철희_Gold persona-Monroe_캔버스에 유채_53×73cm_2008
가면을 쓴 마릴린 몬로가 고혹적이다.
코드가 맞다 싶으면 모든 속내를 다 터놓고 사는 통에
손해를 자주 본 나는 이 가면이 좀 필요하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면을 쓰는게 내겐 참 안어울린다. 살다보면 생존을 위해, 삶을 위해 써야만 하고
쓸수 밖에 없는게 가면이라는데, 나는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보다.
여러분의 가면은 어떤 빛깔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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